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있다 | 현장이 있다

인제 천리길 이야기

박수홍 / 인제군 지속가능발전교육센터 사무국장, ’18.3月

문화(culture)라는 말의 어원은 경작하다(cultivate)는 뜻의 라틴어 동사 쿨투라레(culturare)에서 왔다. 땅에 인간의 흔적을 새긴다는 말이기도 하다. 대지 위에 새겨진 인간의 무늬. 그것이 문화라는 말에 담긴 근원적 의미다. 그런데 오늘날 문화는 대지와의 연관성을 점점 상실하고 무대와 전시장 그리고 쇼핑몰에 갇힌 특별한 예술적 체험활동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땅이 없이는 문화도 없는 것이다. 올해 강원문화재단 강원문화에술교육지원센터 웹진은 강원도의 땅 위에서 그려져왔고 그려지고 있는 문화예술활동을 열심히 찾아갈 생각이다.

첫 번째 소개할 ‘인제 천리길’은 함께 걸어서 지워진 길을 잇고 그 길 위에서 자연과 인간의 결을 만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걷는다는 것은 인간의 근원적 활동이기도 하다. 걷는다는 것은 만난다는 것이다. 땅에 새겨진 인간의 흔적 중에 길만큼 경이로운 것도 없다. 천 리의 길 위에는 그 길 위에 살아온 사람들이 쌓아온 천 리의 깊이가 있다. 그래서 걷는다는 것은 그 삶을 느낀다는 것이고 그 사람들을 읽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길은 문화다.

예부터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던 길들이 사람길에서 찻길로 변해 버린 터라 오롯한 분위기의 오솔길은 아니지만 그래도 인제의 길은 산자수명한 인제의 자연을 마음껏 바라보며 걸을 수 있다.

인제 천리길은 사람, 자연, 문화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걷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수년에 걸쳐 만들어 가는 길이다. 지난해 ‘인제 천리길 함께 걷기’ 프로그램을 통해 30여명의 사람들이 25회에 걸쳐 400km 천리길을 완주했다. 첫걸음으로 인제산촌민속박물관을 출발하여 인제시장을 거쳐 군청, 교육청, 경찰서, 성당, 향교, 학교 등을 바라보며 걸었는데 현대의 건축물이 주는 도시적 분위기와 과거의 역사문화가 깃든 관공서가 어우러져 있는 풍경을 천천히 걸으면서 바라본다는 것은 바쁜 현대인들에겐 색다른 맛이었다. 인북천을 따라 리빙스턴교를 건너고 군사령부를 지나 원통터미널까지 늦은 오후에 첫날 일정을 마쳤을 때 사람들은 지친 모습보다는 새로운 것을 발견한 듯한 표정이었다.

인제에서 군 생활을 했던 많은 사람들의 입을 통해 회자되는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에 나오는 인제읍이나 원통은 38선 이북에 위치하여 6ㆍ25전쟁으로 수복된 접경지역이다. 전쟁은 인제나 원통의 모든 건축물을 잿더미로 만들었으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유일하게 남아 강원도 지정 문화재로 된 인제향교의 대성전이나 반파되어 복구된 성당은 걷는 이들에게 오랜 여운과 숙연함을 느끼게 해 주었다.

인북천을 따라 북으로 가는 길은 강변에 옹기종기 모여 사는 마을들을 지나가는 길이다. 달빛에 학이 아름답고 곱다는 월학리, 선사시대 유물이 발견된 구미동, 대암산 자락에 있는 용늪마을을 지나 민통선에 막힌 서화리를 돌아오면 한국DMZ평화생명동산이 있다. ‘생명의 열쇠로 평화의 문을 열다’라는 표어처럼 평화생명동산은 전 세계에 평화와 생명의 소중함을 알리는 교육기관이다.

느린 걸음으로 접경지역 사람들을 바라보니 전쟁의 아픈 흔적과 상처를 치유하고 모든 생명존중의 가치를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숨결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걷는 길은 사람과 자연과 지역의 특별한 문화를 만나게 해주는 통로인 것 같다.

다산 정약용은 두가지 복에 대하여 글을 남겼는데 “하나는 성공과 출세가 주는 열복(熱福)이요, 또 하나는 안빈낙도의 삶이 주는 청복(淸福)이라”했다. 인제천리길은 청복을 느낄 수 있게 해 준다. 산속에서 맑은 계곡물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 주고 노송에 기대어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좋은 기운을 온 몸 가득 품을 수 있게 해 주며 내 가슴이 나에게 속삭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게 해준다. 모두가 청복(淸福)이다.

가을철 인제 천리길 함께 걷기는 점봉산, 방태산으로 이어지는 백두대간 자락에 자리잡은 마을들을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봄과 여름에 걸었던 천리길이 38선 이북이었다면 가을의 천리길은 곰배골에서 진동 꿩바치로 가는 싸리재를 넘으면서 38선 이남을 걷게 된다. 오랜 시간이 흘러 싸리재 정상에 세운 38표지석이 역사의 경계를 알려줄 뿐 현재는 평화로운 산골풍경이다.

인제천리길은 ‘만남의 길’이다. 나무같은 사람을 만나고, 단풍처럼 곱게 물들어 가는 사람을 만나고, 꽃같은 사람을 만날 수 있어서 늘 설렘과 기다림을 준다. 그리고 곰배골, 오작골, 꿩바치, 설피밭, 쇠나드리, 오류동, 매화촌, 가산동, 미기동 엄수동, 부수동 등 이야기가 가득한 마을을 걸음길로 만난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집들이 시냇물 도란도란 흐르는 냇가와 오곡백과 풍성한 뜨락이 조화롭게 어울려 어디라도 고향같은 마을들이다. 마을과 마을을 이어주는 고갯길을 걷다보면 가마타고 말 타고 시집오고 장가갔던 할머니 할아버지의 옛이야기가 되살아 나오는 듯 정겹다. 또한 소등짝 같은 백두대간 길을 걸으며 환상의 인제 산하를 만나기도 하고 첩첩산중에 굽이굽이 이어지는 고원길에서는 점봉산 설악산 방태산을 먼발치서 만나 볼 수 있다. 산길 어디에서든 자세히 보아야 예쁜 들꽃을 만날 수 있고 산을 지켜주는 소나무를 만날 수 있어서 든든하다.

인제천리길은 치유의 길, 건강의 길이다. 인제의 자연은 하늘과 산과 강의 조화로움이 강건하여 쉼이 없다. 푸른 하늘 흰 구름꽃이 손짓해 주는 산길을 걷다보면 몸이 가벼워짐을 느끼며 춤추듯 걷게 된다. 산언덕을 오를 때의 가쁜 호흡과 이마에 맺히는 땀방울은 힘든 만큼 기분을 좋게 해주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걷는 오솔길은 몸을 더욱 가볍게 만들어 준다. 예전 차 없을 때 이웃마을 놀러가 듯 걸어서 가는 길이다. 물길 따라 휘돌아가기도 하고 산자락을 따라 굽이지게 가기도 하는 그런 느린 길이다. 사람과 함께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걸어가는 길을 가다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은 오래된 미래를 걷고 있을 것이다.

인제천리길을 행복의 길이다. 상남에 있는 용소폭포의 하트모양에서 떨어지는 물소리는 사랑의 멜로디다. 사랑이 이루어지는 행복의 물결이 아름답다. 하남의 가산동은 다락논과 콩밭의 노란색채가 아름다운 마을이다. 고추따는 젊은 부부의 모습이 그림 속 행복이다. 곱게 물든 오색단풍, 야생화의 향기, 가을에 맛보는 열매를 통해 행복을 보고 느끼고 맛보게 된다. 소풍 오듯이 제각기 싸온 간식과 점심도시락을 나누어 먹을 때의 풍경은 행복의 결정판이다. 어찌 그리도 맛난 한 끼 식사가 있을까? 길은 강을 건널 수 있게 해주는 다리 같다는 생각도 들고 삶의 흔적이 남긴 손금 같다는 생각이 든다.

‘길동무가 되면 한솥밥을 먹는 가족이 된 것 같다’는 함께 걷는 이들의 말처럼 인제천리길은 새로운 형태의 가족을 만들어 주는 것 같다. 함께 걷다보니 모든 이들이 바람에 나부끼는 깃발 같다. 그 깃발들은 앞으로 인제천리길을 새로이 시작하는 이들에게 행복한 이정표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