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생각과 마음을 잇다 | 생각을 잇다

내 몸이 있는 곳, 내 몸이 만나는 사람에 주목하라

문화예술교육의 질적 성장을 위한 제언

정원철 / 작가, 추계예술대학교 미술대학, ’18.3月

얼마 전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문화예술교육과 지역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두 개의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최초로 설상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딴 이상호 선수의 경기 중계방송에서 '배추보이'라는 별명의 유래를 들은 때였고, 또 하나는 올림픽 기간 내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컬링 대표 팀 경기에서 선수들의 반소매 경기복이 눈에 들어온 때였다.

문화예술교육이 지난 10년간의 경험을 딛고 '삶과 함께하는 문화예술교육'이라는 향후 5년의 비전을 내세우며 삶과의 연계성을 강조하고 나섰다. 너무도 당연하여 전혀 새울 것도 없는 비전이기는 하나 그간의 문화예술교육이 우리의 삶의 변화에 큰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반성적 슬로건으로 읽혀지는 의미는 있다. 비전의 실현을 위한 몇 가지 전략 중 하나로 '지역기반 생태계 구축'을 제시하고 '지역 중심 문화예술교육'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이제 삶의 실질적 현장이 어디이고, 어떤 범위의 삶에 주목해야 하는지 알게 된 것 같기도 하다. 문제는 '지역'에 대한 해석이다. 우리의 삶은 장소와 사람이 얽혀 구성되는 사건의 연속으로 채워진다. 따라서 '삶과 함께 하는 문화예술교육'이란, '나는 어디에서 살고 있고, 누구와 이웃해 살고 있는지'에 대한 구체적이고 체험적인 인식을 도움으로써 현재의 삶의 질을 높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본다면 문화예술교육 수행 주체들이 인식하는 '지역'은 추상적 범위가 아니라 '내 몸이 있는 곳'이어야 한다.

얼마 전 막을 내린 평창 동계올림픽을 보면서 엉뚱하게도 문화예술교육과 지역성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 두 개의 장면이 있었다. 하나는 우리나라 최초로 설상종목에서 올림픽 메달을 딴 이상호 선수의 경기 중계방송에서 ‘배추보이’라는 별명의 유래를 들은 때였고, 또 하나는 올림픽 기간 내내 세간의 이목이 집중된 컬링 대표 팀 경기에서 선수들의 반소매 경기복이 눈에 들어온 때였다. 눈 덮인 사북의 고랭지 배추밭이 이상호 선수가 스키를 시작한 연습장이었다는 사실은 동계스포츠 강국이 왜 노르웨이를 비롯한 북유럽 국가들일 수밖에 없는지를 새삼 일깨워 줬고, 꽁꽁 얼어붙은 호수나 강위에서 두터운 방한복을 입고 즐기던 컬링이 실내경기로 펼쳐지는 모습은 생각에 생각이 더해지면서 사막 한 가운데 세워진 두바이의 실내스키장으로까지 이어졌다. 다소 비약적일수도 있지만 그간의 문화예술교육이 ‘내 몸이 있는 곳’의 자연, 생태, 역사의 조건과 특성에 충분히 눈길을 주지 못한 채 사막에 스키장을 짓는 것과 같은 무리수를 두어 온 것은 아닌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년 전부터 전국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마주치게 되는 마을벽화를 보면 보톡스 시술을 과하게 한 연예인 얼굴이 떠오른다. 나름의 개성이 뚜렷했던 중년연기자의 얼굴이 특징이 사라진 채 어색하게 변해 있는 모습을 TV드라마에서 봤을 때와 비슷한 느낌이 드는 것이다. 화장과는 다르게 보톡스에 의해 밋밋해진 주름골에는 더 이상 그 사람이 살아 온 삶의 세세한 시간이 깃들어 있을 수가 없다. 잘못 그려진 벽화 또한 마을이 지니고 있는 생태 환경적 특성과 역사, 마을 사람들의 개별적 취향이나 삶의 얘기들을 한 순간에 덮어 버린다. 보톡스는 이미 생겨있던 주름을 없애버려 부자연스럽기도 하지만 입 주변 근육을 둔하게 만들어 섬세한 표현이 불가능하게 한다. 과도한 벽화 역시 과거를 지워버리는 데 머물지 않고, 마을의 현재가 생생하게 드러나지 못하도록 공동체의 활기찬 소통을 제한한다.
마을벽화 못지않게 우리의 시각 환경을 못마땅하게 바꾸고 있는 것이 또 있다. 간판 정비사업을 통해 천편일률적으로 변해가고 있는 상점 간판들인데, 이는 벽화보다 더 광범위하고 급속하게 거리의 인상을 점령한다. 예전의 간판들이 너무 많고 어수선하여 도시미관을 해치는 요소였음을 전적으로 부인할 수는 없지만 그 어수선함 속에는 거리의 역사가 깃들어 있고, 영업의 종류, 상점의 여건, 주인의 취향, 지역의 정서 또한 스며있어 저 마다의 분명한 특색을 보고 상상하는 즐거움이 있었다. 하지만 촬영장세트 만들듯 일시에 없애버리고 동일한 패턴으로 바꿔버리는 ‘토건족’ 방식의 거리정비 행정으로 전국의 도시인상이 거의 같아져 버렸다. 어느 특정한 지역의 거리만을 떼놓고 봤을 땐 깨끗하게 변화된 효과에 점수를 줄 수도 있겠지만, 양평, 공주, 양구, 충주, 강릉 어디를 가도 모두 같은 것을 알고 나면 이것이 과연 더 나아진 문화적 풍경이라고 볼 수 있는지 의문이 생긴다. 연륜이 쌓여 나름의 이야기를 품고 있는 얼굴보다 깨끗하고 팽팽한 얼굴을 선망하는 세상의 흐름을 외면한 채, 얼룩진 담벼락이나 투박한 간판을 그대로 두자는 무리한 주장을 펴려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가 어디서 먼저 했던 것을 무분별하게 따라함으로써 결국 ‘내 몸과 별 관계없는, 근거 없는 문화’의 나라가 되는 것을 우려하는 것이다.

18세기 프랑스의 행정단위로 쓰였던 ‘코뮌’의 범위는 사람이 하루 동안 걸어서 도달할 수 있는 거리였다고 한다. 이 사실은 하나의 독립된 공동체(community) 문화가 생성되는 과정을 상상할 수 있게 하는데, 실체로서의 몸이 활발하게 움직이고 교류할 수 있도록 공동체의 크기를 결정하는 데에 몸의 척도가 쓰였다는 점에서 매우 흥미롭다. 말하자면 몸의 척도가 적극적으로 반영된 공동체란 지형적 특성을 공유하는 공동체, 기후적 특성을 공유하는 공동체, 토양의 특성을 공유하는 공동체, 그리고 그런 특성 속에서 오랜 시간 쌓아온 선대들의 경험을 공유하는 공동체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발을 딛고 살아가는 땅을 기반으로 형성되는 토속문화에는 사람들의 시공간을 이해하는 방식, 자연을 인지하는 체계 등, 몸이 그 곳에 있던 사람들만의 세계관이 담겨 있기 마련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소성을 무력화하는 디지털 기술이 전 지구화의 흐름을 이끌면서 토속적 생태문화는 이미 위기의 수준을 넘어 소멸과 멸종의 단계에 진입해 있다. 특히 우리나라는 이미 오래전에 산업화를 국가 발전의 주요 전략으로 선택함으로써 다양했던 토속문화가 더욱 급속도로 사라졌다. 그나마 남아 있던 마을문화, 지역문화 마저 마치 제땅말(사투리)이 표준어로 대체되듯 하나의 보편 문화로 통합되고 있는 중이다.

사회 문제를 비판하는 영화로 이름난 마이클 무어 감독의 최근 작품 ‘다음 침공은 어디? (Where to invade next?)'에서는 교육, 복지, 노동 등의 정책을 잘 펼치고 있는 나라들을 하나씩 점령하면서 미국이 맞닥뜨리고 있는 문제를 드러내고 그에 대한 해법을 모색하는 과정이 그려진다. 교육문제에 대한 해결국으로 선택된 핀란드에서 무어 감독은 미국의 ’표준화교육‘에 대한 지적을 집중적으로 받는다. 표준화교육은 문제에 대한 답을 정해 놓고 그것을 고르게끔 함으로써 다양한 답의 존재를 불가능하게 한다. 그런 교육방식은 개인의 특성을 배제한 채 획득한 점수로 능력을 환산함으로써 아이들을 한 줄로 세워 버린다. 영화에서 드러나는 미국 교육의 또 다른 문제는 미래의 경쟁사회에 대비하는 데 치중함으로써 아이들이 바로 그 나이 때의 삶을 살 자유와 행복을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것은 미국의 현실이었지만 바로 우리의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의 아이들은 언제 놀고, 언제 친구들과 어울리고, 언제 인간으로 성장하나요?” 라는 핀란드 어느 교장선생님의 질문은 ‘한국의 아이들은...?’으로 바뀌어 들렸다. 핀란드교육과 대비시켜 봄으로써 또렷이 드러나는 우리 교육 현실의 지평 위에 문화예술교육이 앞으로 가야할 길이 있다. 표준화교육으로 비롯되는 여러가지 문제를 해결하고, 온전히 현재적 삶을 살도록 이끄는 교육활동은 문화예술교육이 가장 잘 할 수 있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교육제도와 환경이 아이들의 개별적 특성을 배려하지 못한 채 사람을 표준화하는 문제를 심화시켜 가는 것처럼 우리 삶의 환경 또한 이미 언급한 바와 같이 어디건 같아지는 문화의 표준화현상이 두드러지고 있다. 동네 상권이 사라지고 대형마트나 편의점에 의해 들어섬으로써 도시, 농촌 마을 할 것 없이 모두 같은 것을 먹고 입으며 소비하고 있다. 한 나라 안에서 삶의 양상들이 거의 같아지는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월드 와이드 웹(www)에 의해 세계인의 삶이 실시간으로 교류되고 서로 영향을 미침으로써 전 지구가 동일 문화권이 되어가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기술 사회가 암만 장소의 주요성을 소거시켜버린다 하더라도 눈과 귀만 일시적으로 가상의 장소에 접속할 뿐 몸은 언제나 어느 장소에 살고 있을 수 밖에 없다. 인문 사회학자, 예술가, 도시계획 전문가, 행정가 등 다양한 분야의 사람들이 마을공동체 문화를 미래 사회의 대안으로 진지하게 연구하고 있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승자독식의 자본 논리, 경쟁 논리에 의해 발생되는 문제를 풀 수 있는 방법 중 하나는 획일적 기준을 들이대 우열을 가리는 것이 불가능하도록 통신, 교통이 제한적이던 시절처럼 나라마다, 지역마다, 마을마다 다른 가치, 다른 작동 방식의 삶을 사는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이미 익숙해진 생활 양식을 퇴행시키자는 것이 아니라 몸이 각기 다른 땅을 딛고 사는 점에 더욱 충실하게 집중하여 다른 가치, 다른 재미를 놓치지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결국 문화예술교육을 매개로, 예술과 더불어 가꾸어 가고자 하는 앞으로의 삶의 모습은 어느 무엇으로도 대체될 수 없는 '고유성'의 발견과 발현에 있다. 그 고유성은 내 몸이 있는 곳, 내 몸이 만나는 사람과의 관계에 주목할 때 획득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