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이곳에 있다 사람이 있다

책은 치유다

심 봉 순/ 작가, ‘19.12月

「탄(炭)」은 이런 이유로 나온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내 아버지를 위한 헌사이면서 태백의 모든 아버지를 위한 헌사였다.

「탄(炭)」은 이런 이유로 나온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내 아버지를 위한 헌사이면서 태백의 모든 아버지를 위한 헌사였다.

겨울왕국 1·2 감독 겸 작가 제니퍼 리(디즈니 CCO)는 학창시절 매일같이 다른 아이들의 놀림을 당했습니다. 그때마다 온갖 역경 속에서도 인내하는 신데렐라를 보며 견뎠습니다. 그리고 생각했죠. ‘신데렐라가 나를 위로한 것처럼 나도 다른 사람을 위로하는 이야기를 쓸 거야.’

얼마 전 신문에서 읽은 기사였다. 가난한 편모 밑에서 자라며 친구들로부터 받은 괴롭힘을 책으로 이겨낼 수가 있었다는 것에 크게 공감했다. 그녀에게 책이 없었다면 오늘날 세계적으로 가장 많은 사람들에게 위로를 건넨 겨울왕국 시리즈가 탄생할 수 없었을 것이며 그녀는 월트 디즈니 애니메이션의 첫 여성 최고 크리에이티브 책임자가 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녀의 어머니는 생계 때문에 종종 투잡도 뛰었지만 집은 항상 책으로 가득하게 만들어 주었다고 한다.

내가 문학의 수많은 기능 중에서 치유를 제일 먼저 꼽는 이유다.
내 고향은 태백에서 가장 남쪽에 위치한 방터골이다. 심 씨 집성촌이라 어렸을 때는 친인척만 살았다. 촌장 비슷한 상할아버지가 마을의 모든 문제를 결정했다. 마을에 아기가 태어나면 이름을 지어주었고 정초가 되면 마을 사람들 모두 세배를 드리러 갔다. 마을 아낙들이 온갖 솜씨를 뽐내며 특별한 음식을 준비하는 것도 이때였다. 상할아버지에게 가족의 한해 운수를 점칠 수 있는 토정비결을 보기 위해서였다. 마을에 아픈 사람이 생기면 병원보다 상할아버지에게 제일 먼저 달려갔다. 상할아버지 처방은 천편일률적으로 늘 똑같았다. 마당 한구석에 있는 디딜방앗간 나무 여닫이문에 사람을 조악하게 그려놓고 눈병이 났다면 눈에 커다란 대못을 박았고 다리가 아프다면 다리에 대못을 박았다. 그리고는 붓에 시커먼 먹물을 적셔 눈이나 다리에 칠하는 게 다였다. 나는 홍역 바람으로 유독 눈병에서 벗어날 길이 없어 사시사철 시커먼 먹물이 얼굴에서 떠나본 적이 없었다. 그런 마을이 너무 창피했었다. 그런데 결혼하고 마을을 떠나자마자 그 마을로 다시 돌아가고 싶어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특히 서쪽 하늘에 붉게 물든 노을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으면 도대체 여기서 뭐 하고 있지? 내일은 기필코 내 고향으로 돌아가고 말리라는 다짐으로 전의를 불태웠다. 그렇지만 큰 이유도 없이 결혼을 깬 내가 인간의 도리를 가장 큰 덕목으로 내세우는 그곳으로 돌아갈 수는 없었다.
차선책으로 생각해낸 것은 이런 마음을 글로 표현해 보는 일이었다. 날마다 몇 장씩 쓰기 시작하자 이상하게도 안달복달하는 마음이 시나브로 사라지기 시작했다. 장편소설을 끝내자 저녁마다 보따리를 싸던 습관이 나도 모르게 사라졌다. 무당이 푸닥거리하는 것처럼 글로 마음의 병을 치료하고 말았다. 첫 번째 졸저인 「방터골 아라레이」가 세상에 나온 이유였다.

고향이 그립지 않자 이제 내 마음속에는 고향에 대한 부채 의식이 새롭게 자릴 잡았다. 날마다 글을 읽고 문장을 만지는 사람이라면 꼭 해야 할 일인 듯 싶었다.
집성촌으로 들어오자면 관문처럼 모양도 높이도 같은 기다란 출렁다리 두 개를 통과해야 했다. 특이한 것은 출렁다리 밑으로 흐르는 강물 색이었다. 첫 번째 출렁다리 밑으로는 검은 물이 쿨렁쿨렁 흘러갔고 그 다리를 건너 자갈이 굴렁굴렁 굴러다니는 돌 장광을 얼마쯤 걸어가면 두 번째 출렁다리가 나왔다. 그 다리 밑으로는 수정처럼 맑은 물이 다릿발을 휘감으며 부드럽게 흘러내렸다. 근처에 석탄 광산이 많아 첫 번째 출렁다리 밑으로는 광산에서 흘러나온 오폐수가 그대로 강물로 흘러들어왔다면 두 번째 출렁다리 밑으로는 집성촌 깊은 산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맑은 물이 흘렀기 때문이다. 맑은 강물은 얼마 못 가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검은 강물과 서로 합쳐져 한줄기로 검게 내려갔다. 첫 번째 다리 밑의 물이 말해 주듯이 근처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석탄 광산으로 인해 강물만 몸살을 앓는 것이 아니었다. 전국에서 남부여대하고 몰려온 사람들로 주거는 턱없이 모자랐다. 오죽하면 동남아시아의 수상가옥처럼 검은 강물 위에 쇠파이프나 나무로 지주를 세우고 집을 만든 까치발집이 있었을까. 사람들은 조용한 집성촌까지 찾아왔다. 이들에게는 밤이슬과 눈비를 피할 수 있는 한 칸의 방이면 온 식구들이 다 살 수가 있었다. 처음에는 그들이 타성바지라는 이유로 상할아버지는 머리를 저었다. 하지만 시대의 급격한 흐름 속에서 마냥 독야청청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그들은 대부분 근처 광산에 탄을 캐러 온 분들이었다. 내 친구 아버지도 그중의 한 명이었다. 작은 광산에 다녔었는지 직원 복지시설인 목욕탕이 없었다. 퇴근해서 돌아올 때 보면 탄이 덕지덕지 묻은 검은 작업복에 검은 장화에 둥그런 등이 달린 검을 헬멧을 쓰고 있었다. 얼굴에도 석탄이 새까맣게 묻어서 눈동자의 흰자위와 치아만 하얀색이었다. 입술은 얼마나 빨아먹었는지 분홍색이었다. 철없던 우리들은 그분들 곁에만 가도 탄가루가 묻을 것처럼 오두방정을 떨면서도 쫄랑쫄랑 따라다녔다. 내 친구 엄마는 언제나 냇가 빨래터 가장 아래쪽에서 작업복을 빨았다. 검은 거품이 구름처럼 일어나 맑은 냇물이 금방 시커멓게 변하면 얼른 빨랫방망이로 물을 휘휘 저어 검은 거품을 쫓아내곤 했다. 그런 내 친구 아버지가 광산에서 사고를 당했다. 그 당시 우리가 제일 두려워했던 것은 숙제를 안 해와 종아리를 맞는 것도, 시험 점수가 형편없어 꾸중을 듣는 것도 아니었다. 수업 중에 누군가가 교실 앞문을 똑똑 두드리는 일이었다. 주로 교감 선생님이 복도에 서 계셨는데 십중팔구 광산에서 누구의 아버지가 사고를 당한 날이었다. 그날은 내 친구가 불려 나갔다.

친구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이제는 친구의 엄마가 대신 검은 작업복을 입고 출근했다. 온몸을 검은 탄으로 도배하고 집에 돌아와 친구가 샘물에서 길러온 물로 부엌에서 오랫동안 씻는 모습을 자주 봤다. 회사에서는 홀로 남은 아내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해 주었는데 주로 선탄장에서 석탄을 고르는 일이었다. 친구 엄마가 선탄장으로 출근하면 친구는 자기 몸집만 한 동생을 온종일 업고 있었다. 바닥에 내려놓으면 자지러질 것처럼 울어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배가 고파서 운다며 광산에서 배급으로 받은 생쌀을 자꾸 먹이던 모습이 오랫동안 내 머릿속에 하나의 이미지로 남았다.

세월이 흐르면서 살기도 좋아졌고 시설도 첨단으로 바뀌었으니 이런 악순환은 없어진 줄 알았다.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아주 잠깐 아이들을 가르친 적이 있었다. 첫 제자여서 그랬던지 아직도 그 아이의 얼굴을 그리라면 그릴 수가 있을 정도였다. 눈썹이 진한 총명한 아이였고 리더십도 있었고 책임감이 강한, 무엇보다도 명랑 유쾌한 아이였다. 그런데 그 아이의 아버지가 광산 사고를 당했다. 석탄층을 찾아 바다 밑까지 내려갔는데 방수가 잘못되어 그만 먼 바다로 쓸려갔다. 바닷물이 새는 구멍을 발견한 그가 손가락으로 구멍을 막고 있었던 덕에 동료들은 모두 대피했지만 그는 미처 피할 시간이 없었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아픈 것은 맑은 눈동자의 아이에게 그 소식을 내 입으로 전해야 할 일이었다. 그때 난 여전히 광부들과 그 가족들이 겪는 일들이 현재 진행형이란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그 아이도 내 친구처럼 아버지 삼우제를 지내자마자 학교에 나왔다. 유쾌 명랑한 모습은 악마에게 빼앗겼는지 시든 할미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는 다시 들지 않았다. 마치 한 장면에서 다음 장면으로 장면 전환이 된 듯 싶었다.
이것으로 끝났다면 그래도 다행일 텐데 운 좋게 사고를 당하지 않았던 사람들에게도 결국에는 벗어날 수 없는 다른 수렁이 멀리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어느 날 쓰나미처럼 기습하듯 쳐들어왔다. 하늘의 운을 받은 사람 몇을 빼고는 아무도 비껴갈 수 없는 병이었다. 진폐증이었다. 그곳엔 진폐 전문 병원이 크게 자리 잡게 되었다. 고칠 수가 없는 병인데도 병실에 누워 있는 이유는 마지막 한 자락 희망 때문일 수도 있었고, 다른 어떤 방법도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이 병원에 누워 있으면 그의 아내도 병시중을 위해 함께 병상을 지켜야 했다. 집에는 아이들만 오롯이 남아 자기들끼리 밥해 먹어가면서 학교에 다녔다. 가장이 아프면 식구들도 어찌할 수 없이 모두 아픈 곳이었다.

집성촌에도 어느 날부터 바람이 불었다. 대부분의 사람은 손바닥만한 땅에 삼농사와 벼농사를 지었고 비탈 밭에는 감자와 옥수수도 심었다. 땅이 꽁꽁 얼면 마을에서 가장 큰 사랑에 모여 <사스랭이>를 하며 긴 겨울을 보냈다. 집성촌에만 있는 노름의 일종이었다. 양반 타령만 하던 사람들도 타성바지들이 광산에서 벌어오는 돈이 눈에 들어왔다. 쌀 배급에, 비계가 반이나 됐지만 명절이면 나누어 주는 돼지고기도, 연탄과 맞바꿀 수 있는 연탄표도 좋았지만 무엇보다도 자식들의 학자금이 부러웠다. <사스랭이>를 잘할 줄 모르는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셋째 아들이라 물려받은 땅 한 필지 위에 집 한 칸 짓고 나자 남은 땅은 텃밭 수준이었다. 돈을 많이 벌 수 있다는 소문에 아버지도 광산에 취직했다. 내가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라 나중에 들은 이야기였다. 아버지는 딱 하루밖에 출근을 하지 못했다. 막장이 너무 무서워 들어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 체면을 지상과제로 삼고 있었던 양반 풍토에 검은 탄가루를 뒤집어쓰고 집으로 올 수는 없었던 모양이다. 탄가루가 없는 다른 곳에서 일을 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남편이었고 방안에 그득한 자식이 제비 주둥이처럼 입을 쫙쫙 벌리며 먹이를 탐했던 시기였다. 아버지는 다른 어느 아버지보다 성실하게 가정을 이끌어나갔다. 단지 석탄을 캐는 석탄광부가 아닐 뿐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다른 대부분의 내 친구 아버지처럼 예순을 넘기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탄가루보다 더 무서운 분진이 아버지 폐에 달라붙어 있었다. 병원에 입원해 있었을 때 엄마는 문병을 오지 못하게 했다. 남의 집 자식인 어린 손자에게 병이 옮아갈까 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친구 아버지처럼 우리 아버지도 긴 세월 동안 병상에 계실 줄 알았다. 바쁘다는 이유였지만 결과적으로는 임종도 보지 못했다. 사람이 풀처럼 맥이 없다는 사실을 그때 알았다. 자식이 아버지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것은 불효막심한 일이고 오랫동안 회한에 사로잡히는 일이었다. 글을 써서 사죄해야 했다.
「탄(炭)」은 이런 이유로 나온 소설이었다. 이 소설은 내 아버지를 위한 헌사이면서 태백의 모든 아버지를 위한 헌사였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오롯이 겪은 내 친구들과 그 가족의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다. 글을 쓰면서 태백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온실 속의 화초처럼 자랄 수 있었고 공부도 남들보다 많이 할 수 있었던 이유도 아버지의 헌신 때문이었다. 태백의 아버지들은 날마다 무서워 덜덜 떨면서도 아버지 자리를 포기하지 않았다. 가시고기처럼 자기 살을 자식에게 다 내어주고도 모자람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었다. 장님 코끼리를 만지듯이 더듬더듬 쓴 소설이 「탄(炭)」이지만 탈고를 하고 나자 이제 태백의 일은 잠시 잊어도 될 듯했다. 치유되었다는 뜻일 거다.

내 친구도 내가 이런 글을 써 주어서 정말 고맙다고 했다. 늘 체한 것처럼 답답했던 속이 후련해지는 느낌이라고 했다. 자칫 태백의 아버지들을 잊을 뻔했다며 우리가 누구 때문에 이만큼 살고 있는지 잊으면 천벌을 받을 일이라고도 했다. 부족하고도 부족한 글을 누군가가 읽고 한바탕 울고 나니 가슴이 시원해졌다면 아마 글이 준 위력 때문일 것이다. 비단, 탄광촌의 광부들과 그 가족뿐만 아니라 이 땅의 수많은 아버지, 어머니와 그 가족들의 상처를 어루만지고 치유할 힘이 글 속에 있음에 감사하다.
몇 십 년 동안 연구하고 개발한 약으로 고칠 수 없는 병을 한 권의 책으로 치유했다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 큰 비용도 필요하지 않고 수많은 인력도 필요 없다. 책을 통해 치유된 건강한 정신은 나아가 행복하고 창조적인 사회를 만들어 갈 것이다. 이것이 제2, 제3의 제니퍼 리 탄생을 고대할 수 있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