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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현장이 이곳에 있다 이곳에 있다

평창 오일장

김 도 연/ 강원일보, 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19.10月

오일장은 그런 게 아닐까.

나흘 동안 쓸쓸하게 비었다가 장날 하루 막걸리 잔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는 장거리.

물려주고 물려받는 삶의 그 오랜 반복.

오일장은 그런 게 아닐까. 나흘 동안 쓸쓸하게 비었다가 장날 하루 막걸리 잔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는 장거리. 물려주고 물려받는 삶의 그 오랜 반복.

장날을 손꼽아 기다리던 시절이 있었다.
나만 기다린 게 아니었다. 우리 집 삽사리도 장날을 기다렸다. 집에서 이십리 밖에 있는 진부장이 바로 그곳이었다. 하지만 엄마나 아버지를 따라 장에 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걸어서 가는 게 아니라 강릉에서 대관령을 넘어온 완행버스를 타야 했기에 가난한 산골마을의 부모들은 차비가 아깝고 또 데려가면 이것저것 사달라고 조르는 자식들의 성화가 귀찮았기에 웬만해선 잘 데려가지 않았다. 방안에서, 마당에서, 울타리 밖에서, 길 위에서, 버스정류장에서 울고불고 전 난리를 쳐도 소용이 없었다. 회초리로 얻어맞지나 않으면 다행이었다. 그렇게 나는 눈물 콧물을 흘리며 마을의 버스정류장에 주저앉아 엄마를 태운 채 흙먼지를 일으키며 떠나가는 버스를 바라보곤 했다. 긴 혀로 내 콧물을 핥아주는 삽사리와 함께. 꽃이 피어나는 봄날이었고, 땡볕이 내리쬐는 여름이었고, 먼지를 뒤집어쓴 코스모스가 흔들리는 가을이었고, 눈보라가 몰아치는 겨울이었다. 그리고 오후 내내 장에서 돌아올 엄마를 기다렸다. 아니, 엄마가 머리에 이거나 손에 들고 올 장바구니를.

어린 시절의 장거리는 그야말로 별천지였다. 정말이지 없는 게 없었다. 눈이 휘둥그레지고, 코가 벌름거리고, 벌어진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옷장수, 신발장수, 생선장수, 곡물장수, 장난감장수, 엿장수, 방물장수, 고무줄장수, 약장수, 허리띠장수, 소금장수, 체장수, 함지장수, 그릇장수, 옹기장수, 책장수… 등이 떠밀려서야 겨우 발길을 옮길 수 있었으니. 그 모든 것에 홀려 함께 간 엄마를 잠시나마 잃어버린 적도 많았으니 산골촌놈 중의 촌놈 행세를 하느라 바빴다. 주머니에 있는 동전을 잃어버릴까봐 땀에 젖은 손으로 꼭 움켜쥔 채.

어느 해 가을이었던가. 아마 추석을 앞둔 대목장이었을 것이다. 장거리 한쪽에서 입담 좋은 약장수가 목소리를 키우며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었다. 회충약을 파는 장돌뱅이였다. 회충약을 왜 먹어야 하는지를 한참 설명하더니 그때까지 얌전하게 옆에 서 있던 내 또래의 예쁘장한 여자아이를 앞으로 불러냈다. 아마 딸인 듯했다. 회충약장수는 얼굴이 노란 여자아이에게 엉덩이를 까고 변소에서 볼일을 보는 자세를 취하라고 요구했다. 잠시 뜸을 들이던 여자아이는 이윽고 사람들이 앞에서 바지를 내리고 허리를 구부린 채 엉덩이를 드러냈다. 회충약장수는 아이에게 힘을 주라고 소리쳤다. 장거리에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도 넋이 나간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는데 회충약장수는 이윽고 여자아이의 하얀 엉덩이 사이의 항문에서 손가락으로 기다란 회충을 끌어내기 시작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장거리에 둘러선 사람들 입에서 일시에 탄성이 새어나왔다. 나는 엄마의 손을 잡고 놓지 않았다. 하늘이 노래지고 있었다. 어지러워서 쓰러질 것만 같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엄마도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지갑을 열어 회충약을 구입했다. 나는 오랫동안 장거리의 그 여자아이를 잊을 수 없었다. 지금 그 아이는 무엇을 하며 살고 있을까. 어린 시절의 장거리를 어떻게 기억하고 있을까.

평창의 오일장은 어떤 기억들을 품고 있을까. 조선의 개국공신 정도전은 평창은 수레 두 대가 다닐 정도로 길이 좁고 지대가 높아 하늘이 낮다고 평했다. 한 마디로 첩첩산골 중의 산골이란 얘기다. 이후 평창의 행정구역은 변화를 겪었다. 원래 평창은 현 평창읍과 미탄면, 정선 신동읍(과거엔 평창 동면)이 전부였다. 그래서 평창읍장은 5,10일, 미탄장은 3,8일, 동면은 4,9일이었는데 1906년 강릉에 속해 있던 진부(3,8), 대화(4,9), 봉평(2,7)이 평창군으로 편입되었다. 동시에 평창군 동면은 정선 신동면으로, 도암면(지금의 대관령면)은 정선군에서 평창군으로 편입되는 변화가 있었다. 평창의 남북이 행정구역 개편으로 심한 몸살을 앓았던 것인데 그 여파는 이후로도 만만치 않았다. 하여튼 행정구역 개편이 이루어진 뒤 1930년대 말 평창군의 오일장 현황을 파악한 보고서를 보면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평창읍장(5,10)의 거래액 46,102원, 미탄장(1,6) 44,860원, 방림장(3,8) 24,190원, 대화장(4,9) 270,800원, 봉평장(2,7) 47,330원, 마지막으로 진부장의 거래액은 194,400원으로 확인되었다. 군청 소재지인 평창읍이 뒤로 밀리고 대화장과 진부장이 가장 활발한데 대화의 지리적인 장점과 진부 오대산의 임업자원을 생각하면 그 까닭을 얼추 짐작할 수가 있다. 장거리의 흥행 여부는 으레 그런 법이니까. 조선시대부터 대화장은 전국 15대 시장 중 하나였는데 ‘서울 동대문 밖에서는 대화장을 보라’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더불어 진부는 오대산의 아름드리나무들이 남한강 물길을 따라 서울로 가는 출발점이었다.
그렇게 닷새마다 돌아오는 오일장의 세월이 흘러 여기까지 왔다. 그 세월의 격랑 속에서도 평창의 오일장은 비록 예전만큼 호황을 누리지는 못하고 있지만 사라지지 않고 자리를 지키고 있다. 변해가는 세월의 옷을 아주 느리게 갈아입으며. 지난 세월 가난을 이겨보겠다는 일념 하나로 이삿짐을 꾸려 도시를 향해 떠나가는 사람들을 배웅하던 장거리를 찾아가는 길은 그래서 애틋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그럴 듯한 핑계를 대고 그들처럼 고향의 장거리를 떠나 도시의 반짝거리는 네온사인을 찾아갔으니까. 오래 전 장거리의 회충약 소녀는 까맣게 잊어버린 채.

강원도를 가로지르는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기 전 서울과 강릉을 연결하는 도로는 열악하기 그지없었다. 서울에서 횡성까지는 그나마 양호했다. 횡성을 출발해 새말에서 전재를 넘으면 안흥, 안흥에서 문재를 넘으면 계촌, 계촌에서 여우재를 넘으면 방림이었다. 방림삼거리에서 오른쪽으로 가면 평창읍내, 왼쪽으로 가면 대화, 대화에서 모릿재를 넘으면 진부, 진부에서 진고개와 대관령을 넘어야 비로소 주문진과 강릉이었다. 그게 조선시대부터 유지되던 가장 빠른 길이었고 이후 일제가 자원을 수탈하기 쉽게 신작로를 만들었다. 내가 중학생이었을 때도 문재는 앞에서 큰 차가 오면 마주오던 차는 아슬아슬한 산비탈에서 한참을 후진해야만 다시 앞으로 갈 수 있었다. 어쩌다 그 고갯길들을 버스를 타고 넘게 되었을 땐 멀미를 달고 살았고 차창 너머로 까마득한 산비탈을 내려다보면 너무 겁이 나 오줌을 찔끔거릴 정도였다. 그 고갯길로 버스와 트럭이 사람과 짐을 가득 실은 채 흙먼지를 일으키며 사고 없이 용케 달렸으니 운전기사도 손님들도 참 조마조마한 날들이었을 것이다. 그랬던 길이었는데 2019년 초가을의 나는 자가용을 끌고서 아주 편안하게 전재, 문재, 여우재를 넘어 평창읍내장에 도착했으니 세상이 좋아졌다고 말해야 하는 것일까.

평창읍내장(평창올림픽시장)의 장거리는 바닥 공사가 한창이었다. 그 여파로 대부분의 가게가 문을 닫고 있었다. 장날도 아니었다. 강원도에서 가장 먼저 메밀부치기를 만든 곳인데 아쉽게도 고소한 기름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무쇠 솥뚜껑을 뒤집어놓은 모양의 번철에다 지지는 메밀부치기를 요리하는 방법은 동네마다 조금씩 달랐다. 얇게 부칠 것인가, 두껍게 부칠 것인가. 양념을 한 김치를 넣을 것인가, 소금에 절이기만 한 김치를 넣을 것인가. 요즘은 쪽파나 깻잎 등등의 다양한 야채를 넣기도 한다.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겠지만 내 입맛은 양념을 한 김치를 넣고 두껍게 부친 것을 선호한다. 갓 부친 것도 좋아하지만 하루쯤 묵혔다가 다시 데워서 술안주로 먹을 수 있는 메밀부치기가 딱이다. 하여튼 40년 전통을 자랑하는 평창장의 메밀부치기를 먹을 수 없다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인적이 드문 장거리를 기웃거렸다. 감자옹심이가게, 벼락 맞고 살아난 사나이가 차린 기적의 슈퍼마켓, 흑룡강 식당, 대장철물점의 다양한 물건들, 뻥튀기 가게…

시장의 붙박이 상점들은 그렇게 장거리를 지키다가 장날이 돌아오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장돌뱅이들과 만나 신명나는 난장을 펼친다. 닷새마다 돌아오는 장꾼들의 축제인 것이다. 오일장은 그런 게 아닐까. 나흘 동안 쓸쓸하게 비었다가 장날 하루 막걸리 잔처럼 가득 차서 넘실거리는 장거리. 물려주고 물려받는 삶의 그 오랜 반복.

나는 고개를 끄떡이며 시장 귀퉁이 젊은 오누이가 근래에 새로 문을 연 가게를 찾았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메밀 빵을 굽는 누나는 일 때문에 가게문을 하루 닫았다.

할 수 없이 남동생이 운영하는 건너편의 커피가게에 들러 멀고 먼 에티오피아에서 건너온 원두를 사가지고 대화장(4,9)을 향해 길을 떠났다.

장거리에서 아는 사람을 만나는 반가움을 아시는가? 약속도 없이 우연히 만나면 더 반갑지만 장거리에 터를 잡고 사는 사람을 오랜만에 방문하는 즐거움도 그것 못지않게 즐겁다. 대화초의 고향 대화 장거리에는 그런 사람이 살고 있다. 이름도 의미심장한 ‘88체육사’. 89년에 개업한 체육사를 30년 동안 지키고 있는 이는 소설가 심봉순씨다. 남편은 바깥을 돌며 영업(?)을 하고 아내는 가게를 지킨다. 없는 게 없다. 살아 있는 미꾸라지도 팔고 낚싯대며 테니스라켓, 축구공도 당연히 취급한다.

한때 호황의 시절도 맛보았고 IMF도 겪었다고 했다. 당연히 부부싸움도 하는데 누가 더 오래 가게를 지켰는가가 단골 주제란다. 마침 부부가 함께 있었는데 남편은 성장한 딸의 사진을 보여주며 자랑을 했다. 심봉순씨는 지렁이를 잡아와 팔던 코흘리개 아이들이 어느덧 나이가 들어 자신을 부르는 호칭이 달라진 것을 보고 장거리에서의 세월이 흘렀다는 것을 절감했다며 입을 열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는 대체 누구인가? 대학에서 국어교육을 전공했고 잠시 교사생활도 했는데 지금의 나는 누구인가? 체육사가 겨울철엔 한가한 터라 창작수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해 주었다. 2002년 김유정백일장에 참가해 상을 받았고 이어 봉평 이효석백일장에서도 수상을 했다. 그 여세를 이어 2006년에 정식으로 소설가가 되었다. 등단을 하고 플랜카드가 걸리자 장거리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런 말을 했다. “새댁이 착하게 살더니 소설가가 되었네!” 그동안 쭉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시골장거리란 데가 그런 곳이란다. 누가 무엇을 하는지 보려하지 않아도 다 볼 수 있는 곳. 장거리에서 살려면 그 불편함을 견뎌야만 한다고. 아, 그렇구나! 부부싸움도 아무 때나 못하겠구나. 장날 장구경만 해본 나로서는 겪어보지 못한 일이었다.

오일장뿐만 아니라 다른 모든 면에서 평창의 지형도를 바꾼 사건 중에서 대표적인 것은 영동고속도로의 개통이다. 불행하게도 고속도로는 평창의 북쪽인 봉평, 장평, 진부, 횡계를 관통한 반면 남쪽에 자리한 평창읍, 미탄, 대화는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다. 산업화에 따른 이농현상과 석탄합리화법으로 탄광도 사양길에 들어서자 평창의 남부지역은 급속한 소외의 길을 걸어야만 했다. 새로 뚫린 길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걸 당시에는 알지 못했을 뿐더러 알았다 하더라도 지금처럼 머리에 띠를 두르거나 삭발을 하며 항의할 수도 없는 시절이었다. 평창은 저 옛날의 행정구역 개편 때처럼 다시 알게 모르게 남쪽과 북쪽이 갈라지는 상황에 처하고 말았다. 오일장도 그 운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1976년 방림장이 폐쇄되었고 도암장(옛날의 도암면, 지금의 대관령면)도 진부장과 강릉과의 거리가 가까워지자 같은 운명에 처했다.
대화를 떠나 북쪽으로 올라가다가 장평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봉평장(2,7)으로 길을 잡았다. 흥정천 주변의 메밀꽃들은 시들고 있었다. 아무래도 봉평장은 소설가 이효석과 떼려야 뗄 수가 없는 곳이다. 단편소설 <메밀꽃 필 무렵>의 무대이기 때문이다. 한 소설가의 소설 한 편이 마을을 바꾼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봉평이다.

봉평장은 규모가 작지만 깨끗하게 재정비돼 관광객들을 맞고 있었다. 어느 국밥집에 들어가 앉아 있으면 바로 옆방에서 허생원과 동이, 조선달이 주모가 따라주는 막걸리를 마시며 노래를 부르고 장거리에선 나귀가 힝힝거리며 주인을 찾고 있을 것만 같았다. 성서방네 처녀는 시린 달빛이 지붕에 올라앉은 개울 옆 물레방앗간에서 여전히 울고 있고…

그리고 마침내 나는 오후 세 시가 되어서 진부장(3,8)에 도착했다.

추석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날이었지만 장꾼들은 많지 않았다. 천천히 장거리를 걷기 시작했다. 그물망에 담겨 있는 찰옥수수, 방앗간에서 새어나오는 매운 고추 냄새, 종자용 토종마늘, 천막 아래 걸려 있는 옷들, 광주리에 담겨 있는 과일, 어물전의 물고기들, 비닐봉지 속의 크고 작은 멸치들, 인절미와 찹쌀떡과 쑥떡.
가만, 배도 출출한데 먼저 주막에 들러 막걸리나 한 잔 들이켤까. 하지만 운전을 해야 하니 그것은 불가능하고. 그래, 아쉽지만 부치기나 먹으며 장 구경을 하자.

낯이 익은 주인에게 부치기를 시키고 멍하니 장거리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그동안 참 많이도 진부장을 드나들었다. 술 취한 아버지를 만나 급히 숨기도 했고 술을 좋아하는 친구에게 잡혀 낮부터 얼굴이 벌게진 적도 있었다. 아, 저 생선장수 할머니는 내가 초등학생일 때부터 저 자리를 지키고 있었어. 신발장수 할아버지는 몇 년 전에 이 세상을 하직했다는 소식을 들었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젊은 장돌뱅이. 그래, 그렇게 돌고 도는 거겠지. 야, 송이냄새가 진동한다! 엄청 비싸겠지. 외국에서 시집 온 여자 둘이 지나갔다. 배낭을 멘 할아버지도 허리를 구부린 채 지나갔다.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고맙소야!” “또 보네!” 모두가 닮은 얼굴이었다. 어릴 적 친구들의 아버지와 엄마 같았다. 나도 다시 일어나 그들 뒤를 따라 걸었다. 도라지, 족발, 대추와 밤, 땅콩, 모자, 양말, 장갑, 혁대. 모두 다 따스해 보였다. 오미지, 머루, 다래, 개복숭아. 입안에 금세 시큼한 침이 고였다. 난전 옆에서 장기를 두고 있는 사람들도 진부장의 오래된 풍경이었다.
슬슬 다리가 아파왔다.
가만…… 내가 누군가를 만나러 왔던 것 같은데. 누구였지?
장거리에 우두커니 서서 나는 저 어딘가에서 다가올 사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고 대신 언젠가 내가 진부장을 배경으로 쓴 소설의 마지막 장면만 오롯하게 떠올랐다.

“아버지, 인생이 뭔가요?”

“뭐긴. 장보러 왔다가 장보고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