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생각과 마음을 잇다 생각을 잇다

놀이 권하는 사회, 내면의 고요와 사회적 연결을 찾아서

안 태 호/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이사,′19.10月

많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거창한 목표들을 앞세워 성과를 자랑하지만,

놀이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눈에 보이는 성취라는 것은 보잘것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많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거창한 목표들을 앞세워 성과를 자랑하지만, 놀이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눈에 보이는 성취라는 것은 보잘것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1.
한 달쯤 전의 일이다. 창의예술교육을 표방하는 시설에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하는 프로그램 모니터링을 갔다. 프로그램은 흥미로웠다. 다양한 리듬악기들을 두고 아이들이 각자 악기를 선택해 영상의 사운드트랙을 입혀보는 과정을 체험해 보는 것이었다. 아기자기하거나 스펙터클한 영상에서 소리를 삭제하고 새로 덧붙이는 과정은 소리에 대해 다양한 상상을 할 수 있도록 판을 열어주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데, 내가 흥미로웠던 건 정작 수업의 내용보다 수업을 진행하며 강사와 학생들이 나눈 이야기였다. 보통 아이들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에서는 강사들이 지나치게 진행발언의 멘트와 억양을 마치 유치원 교사를 연상케 하는 톤으로 맞추기 일쑤인데, 이날의 강사는 아이들을 존중하면서도 차분하고 침착한 어조의 진행이 돋보였다는 걸 미리 밝혀둬야겠다. 아무튼, 내가 조금의 충격을 받으며 들었던 강사와 아이들의 문답은 다음과 같다.

강사 - “우리 친구들은 꿈이 뭐예요?”
아이 1 - “백수요!”
아이 2 - “돈 많은 백수요!”
아이 3 - “돈 많고 행복한 백수요!!”

스스로 ‘조금 분주한 백수’를 자처하며, 한량이 꿈이라 떠들며 사는 내게도 이날 아이들의 말은 심리적인 위화감을 안겨주기에 충분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건 내가 이 사실을 SNS를 통해 공유했을 때 사람들의 반응이었다. 대개는 부모들로부터 비롯되었을 아이들의 인식에 대한 탄식이 우선했다. 그러나 이를 다른 시각으로 보는 사람도 있었다. 아이들의 이런 인식이 직장이라는 시스템에 붙박혀 있는 인식을 다른 방식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지 않겠냐는 이야기였다. 말하자면 다음 세대들이 뚜렷한 직장이 없는 상태 - 백수를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것이야 말로, 새로운 활동의 조건이 된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분석과 기대지만, 개인적으로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기존의 노동시장이 평생고용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노동의 해체가 가속화되는 상황,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독 경직된 직장문화에서 비롯되는 노동회피 성향이 당장의 괴로움을 벗어나고 싶어 하는 즉물적인 성향과 결합되어 나타난 결과라는 생각 때문이다. 물론, 아이들의 소망이란 게 어른들, 즉 부모들의 탄식과 넋두리에서 비롯되었을 것도 분명한 것일테다.

2.
2017년과 2018년, 2년을 제주에서 살았다. 제주에서 일상을 보내다 보면, 관광객으로 찾던 제주와 삶의 현장으로서의 제주 사이의 간격을 어쩔 수 없이 느끼게 된다. 관광객은 자신들만의 행동패턴, 꼭 거쳐야만 하는 리추얼이 있다. 가장 극단적인 사례는 하루에 7-8개의 카페를 전전하며 예쁜 사진을 찍는 친구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그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주 생활 동안 육지에서 건너와 나를 만난 사람들 중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려준 친구가 있었다. 집 근처 국수거리에서 만난 그 청년은 제주에서 맛집은 인스타그램으로 찾는다고 했다. 어차피 맛이란 게 다 거기서 거기고 중요한 건 그림이 예쁘게 나오느냐 하는 거라는 이야기다. 사진만 잘 나오면 조금 비싸거나 맛이 약간 처지더라도 큰 문제가 아니라는 투였다. 앞뒤가 바뀌어도 이렇게 바뀔 수가 있을까 싶은 느낌. 아무래도 시대정신은 ‘나는 아름답다’를 표어로 삼은 자기애에 한없이 수렴하고 있는 듯 했다. 개인의 충만을 위한 여가가 아니라 여행과 놀이의 순간에도 타인의 시선을 인식해야만 한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웠다. 문득 부모님이 생각났다. 별 일 아닌 일에도 부모님은 남들이 보면 뭐라고 생각하겠느냐는 말을 입에 달고 사셨다. 남들이 보지 않는다고, 남들은 우리 남루한 삶에 관심이 없다고 아무리 이야기해도 타인의 시선이라는 강박을 끝내 벗어버리지 못하셨다. 인생의 기준을 오롯이 바깥에 두면 여러 가지로 번거롭고 피곤한 일이 지속되기 마련이다.
내 경우, 제주에 살면서 가장 즐겁게 마주친 일은 고사리 채취였다. 고사리는 4월 ‘고사리 장마’가 지나고 나면 6월 초순까지 난다. 고사리의 특성상 가시덤불 근처에 많이 서식하는데, 얄궂게도 제주에선 무덤 근처에 집중적으로 분포한다. 제주에는 곳곳에 고사리밭이 널려 있는데, 고사리를 따라 무심코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여기가 대체 어디인가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종종 외진 곳이라 전화기도 먹통이다. 고사리를 꺾다 길을 잃는다는 말을 절감하게 된다. 고사리를 하나 하나 똑, 똑 꺾을 때면 오롯이 나만을 위해 고사리가 머리를 내밀고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은 근사한 기분이 든다. 세상에 고사리와 나만 존재하는 것 같은 착각. 몰입도 최강의 활동이다. 나는 고사리를 꺾으며 고독한 충만을 경험했다.

3.
몇 해 전 일이다. 조직에서 워크숍을 갔는데, 뒤풀이를 하며 마침 동계올림픽 기간에 중계중인 컬링 경기를 봤다. 매력적이었다. 빙판 위에 커다란 돌을 미끄러뜨려 상대의 돌을 밀쳐내고 중심에 가까운 돌이 많을수록 높은 점수를 얻는다. 그러니까, 얼음판 위에 돌을 굴리는 게임. 어딘가 잉여롭기 그지없다. 피겨스케이팅처럼 육체의 아름다움을 고양시키는 것도 아니고, 스키나 스피드 스케이팅처럼 신체의 능력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 재밌다. 재밌어서 어쩔 줄 모르며 다음 날 일정에도 불구하고 새벽 세 시까지 눈을 부릅뜨고 경기를 지켜봤다. 대체 뭐가 이만한 집중을 부르는 걸까.

당구와 볼링과 바둑을 합쳐놓은 것 같은 경기 진행방식? 물론 흥미로웠다. 다채로운 전략과 수 싸움은 ‘얼음 위의 체스’라는 별칭에 대한 설명을 불필요하게 만들었다. 선수들의 외모? 인터넷의 호들갑만큼은 아니지만 재미를 더하는 요소였다. 공을 굴려대며 선수들이 질러대는 소리? 저게 경기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싶었으나 역시 묘한 즐거움을 안겨주었다.(경기를 보다 보니 한국선수들만이 아니라 모든 나라의 선수들이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방향과 전략지시야 그렇다 치지만 기합을 넣듯, 기도를 하듯 터뜨리는 고함들은 대체...) 이 모든 요소들을 종합해 보니 유희적 성격이 두드러진다. 게임의 룰과 진행방식도, 동글동글한 선수들의 왁자한 고함소리도 뭔가 놀고 있다는 느낌을 강하게 안긴다. 다른 종목들에선 쉽게 느낄 수 없는 덕목이다. 국가대항전이라는 긴장이 없지 않지만, ‘알까기’에서 빈틈하나 없는 살벌함을 느낄 순 없는 거다. 놀이하는 인간, 만세!

4.
아이들과 함께 숲놀이를 하는 선생님을 인터뷰했던 기억이 난다. 아이들은 숲에서 하고 싶은 것, 할 수 있는 것을 한다. 유아와 아동이 다르다. 유아의 경우 자기 감각을 이용해 느낀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만진다. 대체 쟤가 뭘 하나 싶을 정도로 사소한 일들로 자기 주변을 탐색한다. 아동기로 넘어가면 근육이 발달하면서 뛰어다니고, 올라가고, 기어 다니는 등의 신체활동이 많아진다. 그렇게 놀다 다치는 일이 생기면? 다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해 사전에 부모교육을 철저히 시킨다. 언젠가 북유럽에서 봤던 ‘통제 가능한 위험 놀이터’가 떠올랐다. 아이들이 조금씩 다치면서 자기 몸의 감각을 익히도록 만들었다는 그 놀이터는 최근에 놀이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을 통해 한국에서도 실험중이다.
그러나 인터뷰를 하며 가장 인상적이었던 것은 아이들의 놀이방식이다. 안정적인 직장을 접고 숲놀이 강사가 된 선생님은 아이들의 놀이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무에서 유를 창출하는 것도 창의성이고, 기존에 있던 것을 융합시켜 만드는 것도 창의성 아닌가. 만약 로보트를 갖고 논다고 하면 로보트만 갖고 놀 수 있다. 하지만 숲에는 자연물밖에 없다. 자연물은 토끼가 됐다가, 비행기가 됐다가, 곰이 됐다가 한다. 나무 조각 하나가 변화무쌍하다. 거기에 상황에 맞는 이야기를 붙인다. 주변 친구들도 거기에 맞게 함께 노는 것이다. 이게 창의적인 거다. 아이들이 거기에 얼마나 감정이입을 하느냐에 따라 이것이 엄청난 놀잇감이 되는 거다. 기존 장난감들은 그게 제한되어 있다. 이 아이가 나뭇조각을 갖고 놀다가 옆에 있는 큰 나무와 어울릴 수도 있고, 다른 아이를 손님이라고 생각하고 식당을 열수도 있다. 가상의 공간이 생각만으로도 얼마든지 확장되는 경험을 하게 되는 거다.”

나는 이 말 안에 놀이의 고갱이가 들어있다고 생각한다. 국가와 사회에 복무하느라 우리가 잃어버린 세계를 아이들은 아직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아이의 자발성, 창의성, 사회성이 모두 하나의 고리로 연결되는 놀이의 본질이 여기서 드러난다. 앞서 자신의 충만이 외부의 시선을 의식하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이야기했지만, 충만한 개인들이 늘어나면 그 충만은 서로 자유롭게 만날 수 있는 조건으로 작용한다. 놀이가 자유와 함께 사회적 관계로 진화하는 순간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우선 잘 놀아야 한다. 많은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이 거창한 목표들을 앞세워 성과를 자랑하지만, 놀이의 본질을 꿰뚫기만 한다면 눈에 보이는 성취라는 것은 보잘것없어지는 순간이 온다.

5.
사실, 생각해보면 노는 일마저 항상 어딘가 등 떠밀려 과업을 수행하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TV를 보면, 컴퓨터 모니터를 켜면, 핸드폰을 열면 온갖 종류의 자극이 달겨든다. 아마도 이는 노동 사이클의 일환으로 여가가 배치되는 상황과 관계가 깊을 것이다. 안정적인 노동력 재생산을 위한 시스템의 은총.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말이 회자되는 데에는 이유가 있다. 요한 하위징하는 놀이가 가진 중요한 속성 중 하나를 무목적성이라고 했다. 그러나 대개의 현대인에게 놀이나 여가라는 것이 갖는 의미는 일상 사이클로의 복귀를 위한 잠시의 이완일 것이다. 게다가 도시의 놀이는 돈을 필요로 한다. 돈을 투입해서 놀이와 유흥을 만들어내는 구조가 군산복합체를 연상시킬 만큼 단단하다. 우리는 이를 ‘시스템의 명령’으로 인식한다. 한국어에서 ‘논다’라는 의미가 발현되는 방식을 생각해 보면 이는 더욱 자명해진다. 우리는 직업이 없는 상태에 대해(놀고 있습니다), 무언가 이치에 닿지 않는 엉뚱한 일을 벌이는 사람에 대해(놀고 있네), 정상으로 이야기되는 사이클을 벗어난 청소년에 대해(노는 애들) 논다는 표현을 사용한다. 모두 부정적 성격이 두드러지는 말이다.

가끔은 놀이마저 특정 직업군들의 전유물이 되어버린 것 같다. 대표적인 것이 스포츠와 예술이다. 신체 활동을 통한 즐거움은 1초, 1밀리미터를 다투는 선수들의 몸이나 치열한 경쟁구도를 관람하는 것으로 대체됐다. 인간 본연의 창의성을 발현하는 일은 예술가들의 일로 치부된다. 점차 심화되는 스포츠의 상업성이나 예술의 고립은 신체활동이 주는 기쁨의 에너지나 예술로 대표되는 창조적 출렁임이 소실되고 있는 뚜렷한 증거들이다. 모두가 마땅히 누려야 할 즐거움의 그 자리는 미디어의 소란이나 단발적인 ‘체험’들이 채워나가고 있다.

6.
오랫동안 노는 것은 죄악에 속했다. 최소한 권장하지는 못할 덕목이었다. 마르크스는 노동이야 말로 인간의 본질이라고 했고, 칼뱅은 신 앞에서 성실함이 자신을 구원할 거라고 했다. 그러나 언제부터인가 사회는 여가를 예찬한다. 잘 놀아야 일도 더 잘하고 성공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여가 권유하는 사회’의 온갖 시끌벅적함에도 불구하고 결국 남는 것은 공허다. 하나의 자극을 수행하고 나면, 또 다른 자극을 찾아 동분서주해야 하는 게 엄연한 현실이다. 결국 문제는 부박하게 떠도는 외화내빈의 놀이를 가로질러 어떻게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평온함을 획득할 수 있을까로 좁혀진다. 내면을 응시할 수 있는 고요와 고독, 그리고 충만한 고독을 연결해낼 수 있는 사회적 여가를 어떻게 일굴 것인가. 이 질문은 다시 놀이라는 것이 수단이나 방법, 아이템의 문제가 아니라 태도와 지향의 문제라는 것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