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삶 속 문화가 핀다 문화가 핀다

정원에 구현한 작은 ‘월든’

고영직 / 문학평론가, ’19.7月

나는 ‘잘 듣는다’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예의와 두려움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감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나는 ‘잘 듣는다’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예의와 두려움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감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홍시여 잊지 말게 / 너도 젊었을 때는 / 무척 떫었다는 것을.”
영화 <인생 후르츠>(Life Is Fruity, 2017)를 보고 난 후 가장 먼저 일본 근대문학의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1867~1916)가 쓴 위의 하이쿠(俳句)가 절로 떠올랐다. 인생을 ‘홍시’로 비유한 나쓰메 소세키의 하이쿠는 영화 <인생 후르츠>의 기획 의도와 썩 잘 어울린다. ‘오래 익을수록 인생은 맛있다!’라는 <인생 후르츠>의 메시지에서 보듯이 인생이란 열매가 잘 익어가는 것과 다를 바 없다는 비유를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점은 여러 차례 영화에서 내레이션 되어 되풀이되는 메시지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가령 ‘바람이 불면 낙엽이 떨어진다. 낙엽이 떨어지면 땅이 비옥해진다. 땅이 비옥해지면 열매가 열린다. 차근차근, 천천히.’라는

대사는 어쩌면 우리네 인생에서 나이 듦에 대한 메타포라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영화 <인생 후르츠>는 90세 건축가 할아버지 츠바타 슈이치와 87세 ‘슈퍼 할머니’ 츠바타 히데코 부부 이야기를 잔잔하게 다룬 다큐영화이다. 두 사람 나이를 합치면 177살인 이 부부는 50년 동안 살아온 자신의 집 정원을 자신들만의 작은 숲으로 만들었다. 과일 50종과 채소 70종을 키우며 살아가는 노부부의 일상은 슬로 라이프의 삶 그 자체라고 보아도 좋다. 한마디로 말해 자기 집 정원에 구현한 ‘월든(Walden)’이라고 말해도 좋으리라.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구현한 월든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이들 부부는 혼자 고립되어 산 날보다 함께 산 날이 훨씬 더 길고, 자신들이 꿈꾸는 이상을 정원에 직접 구현했다는 점이다.

장소의 에로스를 위하여

<인생 후르츠> 속 노부부는 자연결핍증후군을 온몸으로 앓고 있는 현대인들과는 전혀 다른 삶을 살고 있다. 우리는 누구나 자연에서 살아가는 삶을 갈망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런 사실을 너무나 잘 알지만 좀처럼 행하지 않으며 하루살이처럼 살아간다. 혹은 <나는 자연인이다>처럼 혼자 세상과 등진 채 ‘퇴각’하는 삶을 살아간다. 그래서 번아웃을 온몸으로 앓는다. 주말이면 국내외 명승지를 찾아 여행하지만, 자연은 정복과 소비의 대상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이른바 ‘생태관광’이라는 이름의 여행 열풍에 대해 《녹색평론》 발행인인 김종철 선생이 『근대문명에서 생태문명으로』(녹색평론사 2019)에서 “요즘엔 많은 사람들이 마지막 작별을 고하려는 듯이 허무주의적 태도로 야생의 자연을 소비하고 있다”고 비판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 우리는 자연을 그저 소비의 대상으로 ‘소비’할 뿐이다. 우리는 자연에서 녹색 회복탄력성(green resilience)을 찾을 수 있다는 점을 잘 알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철저히 관조의 소비 대상인 선에서만 그러하다. 우리의 몸과 마음 자체가 이미 철저히 자연 혹은 자연적인 것과 ‘저만치’ 멀어져간 근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좀처럼 자연 그 자체의 경이로움을 망각한다. 그 결과 우리는 장소의 에로스를 잃어버린 채 초라한 ‘경제동물’이 되어버렸다. 예를 들어 어느 나무를 보고 나무의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보다는 ‘저 나무 자르면 책상 몇 개 나오겠는데’라고 생각하는 문화를 당연시한다. 예를 들어 ‘4대강 살리기’라는 이름으로 아름다운 강을 파헤치고, 아름다운 제주의 비자림이 톱날에 베어지고, 전국 연안의 갯벌이 메워지는 것을 ‘발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의 문화를 견고히 한다.

지금 당장 ‘장소의 에로스(eros)’를 부활시켜야 한다. 영화 <인생 후르츠>에서 가장 부러웠던 것은 이 작은 숲이야말로 장소의 에로스가 생생히 살아 있는 장소라는 것이었다. 노부부는 이 작은 숲에서 모든 일들을 스스로 직접 꾸준히 행한다. 텃밭을 일구고, 정원의 갖은 열매와 채소를 따서 복숭아조림·푸딩·체리 요구르트·훈제 베이컨 등을 만들어 사람들과 나누는가 하면, 돈보다 ‘사람’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으로 사람들과 시시콜콜한 관계를 꾸준히 이어간다. 한 장소에, 한 집단에, 한 공동체에 자신이 소속되어 있고 거기에 전념할 때, 인간은 자신이 무엇과 이어져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노부부가 “뭔가를 만들어내는 장소를 물려주고 싶다”며, 낙엽을 모아 텃밭에 거름을 주며 ‘좋은 흙’을 만들기 위해 애쓰는 모습에서 그런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인도 사상가 사타쉬 쿠마르가 말한 것처럼, 흙(soil)에 대한 노부부의 사랑은 결국 우리 영혼(soul)과 사회(society)로 확장되는 것이리라. 3S가 하나로 이어지는 것이다.

특별한 사건이 없는 다큐영화이지만, 건축가인 남편 츠바타 슈이치의 작은 변화가 퍽 흥미롭다. 도쿄대를 졸업한 엘리트 출신인 남편 츠바타 슈이치는 젊은 시절 일본주택공단의 창설 멤버로서 활동했다. 패전 후 경제개발이 우선이던 1960년대 일본에서 나고야 외곽에 조성된 고조지 뉴타운 설계에 참여하는 등 경제개발정책에 적극 참여한 것이다. 그러나 뉴타운은 츠바타 슈이치의 설계대로 지어지지 않았고, 고조지의 산 또한 원형을 잃고 무참히 파괴되어 평지가 되었으며, 그곳에는 8만호라는 대규모 주택단지가 건설되었다. 이후 조직 생활을 그만둔 건축가 부부는 1975년 토지 300평을 사서 15평짜리 집을 짓고, 나머지 땅에는 나무를 심고 농작물을 심어 작은 숲을 가꾼다. 좀처럼 앞에 나서는 않는 남편과 노부부의 성격이 그대로 반영된 ‘시크릿 가든’이라고 해야 할까. 그는 말한다. ‘내가 가진 작은 땅으로 작은 숲을 만들면 남들도 그렇게 하지 않겠느냐’고. 이 말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행복이란 무엇인가’라는 유구한 질문에 대해 ‘간소, 자립, 관대, 신뢰’라는 네 단어로 말한 맥락과 잘 통한다고 말할 수 있으리라.

물론 노부부가 구가하는 슬로 라이프의 삶이란 매달 32만 엔씩 연금을 받기 때문에 가능한 것 아니냐고 트집 잡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정도 연금을 받는 세상의 모든 은퇴자들이 <인생 후르츠> 속 노부부처럼 작은 숲을 일구며 사는 것은 아니라는 점에서 이들 부부의 삶이 폄훼되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는 일본주택공단 퇴직 이후 건축가로서 어떻게 살았는지 자세히 나오지는 않지만, 건축가인 남편이 건축을 대하는 태도가 달라졌다는 것을 알 수 있는 대목이 나온다. 즉 자연과 공존하는 정신병동을 설계해달라는 의뢰를 받고 인생의 마지막 정열을 불태우다 채 완공을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게 되는 남편의 모습이 그것이다. 정신병동의 담당자와 아내가 나누는 대화에서 “집은 삶의 보석상자”라고 생각했던 건축가인 남편의 인생철학을 확인하는 것은 영화를 보는 작은 즐거움이다.

살아 있는 것들의 편(便)이 되어

우리는 자신의 존재가 어떤 특정의 장소에 단단히 결합되어 있을 때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다는 점을 모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네 삶은 경제발전이라는 공허한 미래주의에 현혹되어 무엇을 위한 것인지조차 모르고 ‘더 높이, 더 멀리, 더 빨리’ 어딘가로 가는 삶이야말로 성공한 삶이라는 망상에 사로잡혀 산다.

그러나 나와 당신은 무엇을 위해 어디로 가고 있는가? 국민소득 3만 달러를 돌파한 시대에 오늘의 밥은 물론 내일의 밥도 보장받을 수 없는 불안노동자들이 급증하고, 어딘가 한 곳에 뿌리내리지 못한 사람들이 깊은 마음의 질병을 앓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어디에서 희망을 찾을 수 있을까. 우리는 어쩌면 근대의 저주는 ‘뿌리 뽑힘’에 있음을 직시해야 할지 모른다. 자기 존재의 뿌리가 뽑힌 자들의 영혼은 불안할 수밖에 없다. 시장이 신(神)으로 숭배되고, 자연은 착취해야 할 ‘자원’으로밖에는 취급되지 않는 사회가 추구하는 근대화란 어쩌면 극도의 ‘정신의 빈곤’을 낳는 것은 아닌지 자문해보아야 한다.

어느 시인은 말했다. 생명의 반대는 죽음이 아니라 ‘무관심’이라고. 장소의 에로스가 완벽히 사라진 자연 앞에서 우리의 눈과 귀는 자연의 소리를 잘 듣고 있는가. 지난 산불로 잿더미가 된 강원도 산하를 보며 비통한 마음을 느끼시는가. 보(洑)로 막힌 강물이 얼마나 흐르고 싶어하는지 아시는가. 전기톱날 앞에 선 제주의 비자림이 울부짖는 침묵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눈과 귀를 갖고 있으신가. 나는 ‘잘 듣는다’는 것이야말로 자연에 대한 예의와 두려움을 생각하는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지금 여기 문화예술교육이 놓치지 말아야 할 감각이 바로 여기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그런 점에서 후시하라 켄시 감독이 연출한 다큐영화 <인생 후르츠>는 자연을 대하는 우리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는지, 하나의 잘 익은 ‘후르츠’처럼 잘 나이 든다는 것은 무엇이어야 하는지에 대해 잔잔하지만 깊이 있는 영상을 제공한다고 생각한다. 키키 키린이 여러 번 내레이션하는 영화 속 ‘차근차근 천천히’라는 대사가 묘한 중독성을 가지며, 우리 안의 그런 에콜로지의 마음을 일깨우는 듯하다. 차근차근 천천히, 작은 새들을 위한 옹달샘을 만들고,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을 하다 보면 여러 길이 보이게 된다는 노부부의 인생 메시지는 무엇이 좋은 삶인지에 대해 우리에게 암시하는 바가 적지 않다.

하나 아쉬운 점을 지적하자. 타이완에서 저자 사인회를 마친 건축가가 20대 시절 타이완 해군기지공장에서 함께 일한 친구 천칭순(陳淸順)의 묘를 찾아 옛 일본 군가(軍歌)를 부르는 장면이다. 묘비 옆 땅을 파고 옛 친구가 새겨준 도장을 묻어주며 “잘 가요, 천군!”하며 작별을 고하는 장면을 나는 마냥 아름답게만 볼 수 없었다. 일본제국주의 시절의 군가를 부르며 옛 친구를 회상하는 장면에서 소위 ‘계속되는 식민주의’(서경식)의 문제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점을 확인했다면 지나친 억측인 걸까. 어쩌면 건축가의 뇌리에는 일제 시절의 경험이란 젊은 날 겪게 되는 하나의 ‘통과의례’쯤으로 각인된 것은 아닌지 의심하게 된다. 물론 이 영화가 옛 식민지 문제를 성찰하는 영화는 아니라는 점을 나 또한 모르지 않는다. 영화를 보고 난 후 이 장면이 계속 잔상으로 남아 있는 것을 단지 ‘피해자의식’이라고 치부할 수만은 없으리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 후르츠>는 ‘자연 없이 문화 없다’는 점을 잘 보여주는 웰메이드 영화이다. 노부부가 자기 집 정원에 구현한 작은 ‘월든’은 우리가 이 지상에 잠시 살면서 가장 잘하는 일은 ‘나무’를 심는 일이라는 점을 나직한 목소리로 강력히 환기한다. 그래서 ‘살아 있는 한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라는 아내의 말에서 나는 잔잔한 감동을 받는다. 나는 이 말에서 전후 최고의 일본 (여성)시인으로 활동하며 “살아 있는 한 살아 있는 것들의 편(便)이 되어” 살았던 이바라기 노리코의 음성을 듣게 된다. 문화예술교육 또한 살아 있는 것들의 ‘편(便)’이 되는 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자연을 정복과 착취의 수단으로 보지 않는 감각의 부활에서 시작한다. 비 온 뒤 쑥쑥 자라는 죽순을 보며 경이로운 마음으로 ‘죽순아, 잘 자라렴.’이라고 말할 줄 아는 감각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이미지 출처: 영화<인생후루츠> 스틸 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