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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과 현장이 이곳에 있다 현장이 있다

생활의 발견

생활의 발견

김재익 / 별의별교육문화협동조합 이사장, ’19.7月

두 발로 걸어서, 손끝으로 만져보고, 코끝으로 가져와 냄새도 맡아 보는 것.

이러한 일상의 자연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두 발로 걸어서, 손끝으로 만져보고, 코끝으로 가져와 냄새도 맡아 보는 것. 이러한 일상의 자연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자연을 보게 되다

목이 탄다. 근래 내가 살고 있는 원주의 산하대지는 타는 목마름으로 애처로이 공연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비단 원주뿐만이 아니다. 아름다운 강원도의 곳곳이 마른장마로 시름시름 타들어가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주변의 자연을 보고 있자니 애가 탄다. 사람들이야 물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있지만, 말 못하는 짐승이나 한 곳에 일생을 뿌리박고 정주하는 식물들은 어쩌란 말인가. 그나마 남아 있는 물기를 앗아갈까 불어오는 바람마저 야속하기만 하다.

자연에 대한 이러한 공감의 배경에는 내가 활동하고 있는 ‘별의별교육문화협동조합(이하 별의별협동조합)’이 있다. 별의별협동조합은 치악산 자락에 위치해 있다. 집을 나와 치악산을 끌어안으며 조합 사무실에 출근하고, 또 산을 등지며 집으로 향한다. 원주는 참으로 산이 멋있는 곳이다. 강릉은 드넓게 펼쳐진 동해바다를 마주하며 멋들어진 긴 백사장의 아름다운 멋을 간직했다면 춘천은 북한강과 소양강이 만나 호반의 신비하고 오묘한 멋을 품고 있다. 반면 원주는 시내를 중심으로 병풍처럼 둘러싸인 여러 산들의 운치를 일 년 내내 느낄 수 있는 그런 곳이다. 그 중 단연 첫 번째 명산은 치악산이다. 치악산은 원래 붉을 적(赤)자를 써서 적악산이라고 했다. 혹자는 붉은 단풍이 아름다워 그리 불렸다고 하고, 혹자는 해가 저물 때 비쳐진 노을이 캔버스가 된 산에 비춰져 적악산이라 불렸다고도 한다. 연유야 어찌되었든 그 이미지는 치악산을 적악산이라 했던 그 시절의 심상을 떠올리기에 충분하다. 그 아름다운 치악산 속에 터를 잡고 협동조합을 세운 이후, 두 번째 여름을 맞이하고 있다.

역시 사람은 노는 물이 달라야 하나보다. 나는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생강나무를 보았고 산수유보다 먼저 꽃이 핀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아는 사람들은 다 아는 내용일 테지만, 이 두 나무는 봄을 맞이하는 나무들인데 꽃이 모두 노란색을 띤다. 가까이서 보았기도 했고 주위에서 알려준 지식을 통해서 바로 본 세상은 저마다 이름이 있고, 당연하게도 저마다 각양각색이었다. 김춘수 시인의 말처럼 하나의 몸짓들에 불과한 것들이 시나브로 자연이 내게로 다가온 것이다. 아니, 내가 자연의 곁에 다가가게 되었다. 이런 계기로 타는 목마름으로 시름하는 자연의 갈증을 공감하게 되었다.

별의별교육문화협동조합은

별의별협동조합은 내 아이를 위해, 우리 아이들을 위해 나아가 우리 모두를 위한 교육문화를 생각하며 뜻 맞는 분들과 함께 만들게 되었다.
이름 모를 식물들을 한데 묶어 잡초라 말하는 것은 그 식물들에 대한 모독이며 폭력이다. 농담 같은 이 말은 사실 무서운 말이다. 실재하지도 않는 잡초라는 추상의 개념을 가지고, 실재하는 다양한 식물들을 한데 묶어 치부하는 것은 그 식물들의 다양성을 존중하지 않는 처사이다. 이는 사람에게도 마찬가지다. 물론 이를 한데 묶어서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부분에서는 이로운 점이 있다. 이를테면 공통양식을 공유하는 사회윤리적인 측면에서 그러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효율성의 가치보다는 개별적이고 특수한 개체에 집중해야 하지 않을까. 더욱이 교육의 방향은 그렇게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우리조합은 자연 그대로의 본성을 모시고, 살리고, 키우자는 모토를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하나하나의 존재들이 지니고 있는 자신만의 별을 상징화하여 별의별교육문화협동조합이라 부르게 되었다. 앞으로 우리는 모두가 생활하는 사회의 기본적인 보편성을 잃지 않으면서도 개개인의 개성을 견지하는 방향으로 교육문화를 만들어가고자 한다. 이런 사정으로 자연을 공감하며, 나의 삶에 집중하는 방법들에 대해 자연스럽게 고민하게 되었다. 또한 그 고민의 실마리중 하나가 예술이라는 것을 믿게 되었다.

일상으로의 초대

원주 도심에서 차로 10여분이면 도착하는 치악산에서 조합활동을 하며 놀랐던 것은 이렇게 자연이 가까이에 있다는 것이었다. 자연과 함께 생활하지 않는 사람들이 어디 있겠느냐, 심지어 서울의 도심에서도 자연과 함께 생활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반문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물음에 나는 자연과의 교감이 차이라고 말할 것이다.

교감은 본질적으로 무엇인가 주고받을 상대인 타자의 존재가 필연적이다. 그런데 타자로서의 자연은 늘 자아의 주체적 활동에 의해서 드러나는 객체에 불과하다. 그래서 자연을 바라보고 인식하는 주체에 의해서 자연의 모습이 드러나게 된다. 이러한 과정은 자신의 일상생활을 돌아보게 되는 경험을 선사한다. 이런 생각들을 함께 생활하는 선생님들과 나누다가 이것에서 “생활의 발견”이라는 아이디어를 얻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동안 인식하지 못했던 자연 속에서 잊혔던 일상생활을 발견하고 싶었다.

주어진 환경 속에서 적응하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그 속에서 우리는 삶을 일구어 나아갔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문제뿐만 아니라 문화적인 측면에도 그러했다. 이는 고대에도 마찬가지였다.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나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가 말해주는 것은 문명이 그다지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서도 주어진 자연 속에서 문화를 향유했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이다. 호모 루덴스(Homo Ludens)로 표상되는 인간의 속성은 작은 토기에도 빗살무늬를 넣었던 고대인들의 모습이나 홑이불에도 꽃 등의 자수를 넣었던 우리의 옛 선조들의 모습에도 비춰진다. 그러나 우리의 문화 속에 녹아 있던 본래적 속성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바래지고 퇴색되어 가는 것 같다. 이전에는 자연을 손끝과 코끝으로 바라보았던 것들이 이제는 유리창 너머 눈 끝으로 멀어졌고, 작고 소소한 일상의 놀이로서의 예술은 전문 직업인들이 전유하고 있는 영역으로 구획되어지는 것 같다.

안타까웠다. 아니라고 생각했다. 우리들은 자연과 소소한 예술을 통해서 생활을 재발견하고, 일상으로 사람들을 다시 초대하고 싶었다. 자연과 예술을 일상의 생활로 가져오고자 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생활의 발견: 삶의 예술화, 자연의 일상화”이다. 일상의 예술은 고가의 예술품을 수집하는 돈이 많은 사람들이나 문화적 식견이 높은 사람들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누구나 일상 속에서 예술을 향유하고 싶은 욕구가 우리 모두에게 있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었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 속에서 생활하는 것 같지만, 결국은 유리창 너머로만 바라보았던 자연이 일상에 있다는 것을 알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들은 문화로서의 자연을 돌려주고자 사람들을 초대하여 우리의 일상을 보여주고자 했다.

‘자연의 일상화’가 있던 날

2019년 6월 26일은 바로 자연의 일상화를 위한 날이었다. ‘생활의 발견’ 회원들을 이끌어줄 선생님은 우리 조합의 이사이자 숲해설가인 이민아 선생님이었다. 조합 공간에 모여, 오늘의 일정에 대한 설명과 루페(loupe)라는 작은 확대경을 나누어 받았다.

우리 조합 내에 사는 작은 꽃나무와 아까시나무, 산초나무 등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회원들 중의 어느 한 분은 이쪽에 대한 지식이 많으셨다. 그래서인지 다양한 이야기를 함께 나누어서 자연을 이해하는데 더 깊이 다가갈 수 있었다.

5분 정도 오르니 치악산 둘레길과 만났다. 작년 말에 조성된 치악산 둘레길은 사람들에게 입소문을 타고 알려져 비교적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곳이다. 오늘의 하이라이트는 국형사 옆에 위치한 계곡이었다. 사실 ‘자연의 일상화’ 프로그램의 오늘의 주제는 계곡 생태를 관찰하는 것이다. 우리 일행들이 평일 오전 계곡에 내려 앉아 있으니 오고 가는 등산객들에게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런 시선보다는 자연에서 오는 경이로움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의 관심을 받았던 것은 수많은 올챙이들과 한 마리의 도롱뇽이었다. 가뭄 때문에 줄어든 계곡의 물줄기가 움푹 페인 바위에 갇혀 있었다. 그곳에 올챙이들이 와글와글 떼를 지어 몰려 있었다. 그중에는 벌써 뒷다리가 나온 녀석도 있었다.

이민아 선생님은 투명한 채집통에 이 녀석들을 담고 하얀 면보 위에 올려놓았는데 같아만 보였던 올챙이들에게서 조그마한 차이를 발견하는 재미가 있었다. 특히 한 마리의 도롱뇽은 오늘의 주연이었다. 어느새 우리들은 동심(童心)으로 되돌아게 되었다.

물이 많은 강에만 사는 줄 알았던 다슬기를 산의 계곡에서도 확인할 수 있었다. 이름을 몰라 불러줄 수는 없었지만 다양한 계곡의 생명체를 만났던 시간이었다. 2시간이 어느새 흘러 우리는 다음 시간을 기약하며 오늘의 ‘숲과 계곡의 생태탐험’은 막을 내렸다.

문화의 시작

누군가는 오늘의 ‘자연의 일상화’프로그램이 특별할 것 없는 체험이라 흘겨볼 수 있을 것 같다. 바로 그것이 우리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이었다. 두 발로 걸어서, 손끝으로 만져보고, 코끝으로 가져와 냄새도 맡아 보는 것. 이러한 일상의 자연을 사람들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는 『지각의 현상학』에서 몸의 현상은 의식의 현상보다 앞선다고 했다. 그는 몸은 현상을 만들어내고, 그 현상에 의해 새롭게 현상된다고 말한다. 일반적으로 우리는 몸 보다는 의식에 좀 더 중요한 의미를 두어왔다. 보다 좋은 것, 선(善)한 것에 가치를 두어왔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세상을 접하는 것은 살아있는 구체적인 몸을 통해서 가능한 것이 아닌가. 제아무리 사이버세상이니 가상세계니 이것들이 4차 산업혁명을 여는 열쇠가 된다고 하더라도, 구체적인 자연을 문화로서 다루지 않는 세계가 얼마만큼의 의미를 우리에게 던져줄 수 있을 것인가?

얼마 전 흥미로운 뉴스가 있었다. 그것은 세계보건기구(WHO)에서 게임사용장애(Gaming disorder)를 국제질병분류체계에 포함시킨 일이다¹⁾. 그간의 축적된 데이터에 따른 당연한 결과라 여겨진다. 본래 게임은 사이버(cyber; 공상) 세계를 기반으로 한다. 이는 구체적인 삶의 일상을 기반으로 하는 자연과의 경험이나 일상에서의 소소한 예술의 경험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서양 특히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들려오는 이채로운 교육에 관한 소식들²⁾ 은 나의 눈을 한 번 더 끈다. 그 내용의 핵심이 바깥에서의 구체적인 삶에 대한 강조이기 때문이다.

생각보다 가까이 있는 자연에 한 발 다가가고, 소소한 예술을 통한 일상으로의 초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본래 가지고 있었던 생활의 작은 부분을 발견했으면 한다. 그것이 우리의 삶을 풍족하게 해준다는 보장은 없다. 그러나 적어도 우리의 삶을 풍요롭게 하는 출발임에는 분명하다. 그것이 결국 우리의 일상의 문화를 만들어가는 시작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1) 배준열, “WHO 게임중독 질병 분류, 적절한 결정”, 2019.06.10. 의사신문
2) 권오성, “실리콘밸리에 컴퓨터 없는 학교가 있다! 왜?”, 2015.01.17. 한계례신문; 강지원, “실리콘밸리의 선지자 “당장 당신의 SNS를 폐쇄하라””, 2019.05.30. 한국일보;
Cliff Jones, Why low-tech and outdoor play is trending in education, 2018.06.22., Financial Tim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