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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퀴달린학교 <땅과 예술반> 흙장난, 물장난

바퀴달린학교 <땅과 예술반>

흙장난, 물장난

정민룡 / 광주북구문화의집 관장, ’19.7月, 인터뷰이 : 박문종 / 화가

중요한 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듯

아이들도 자연 환경에 무방비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듯 아이들도 자연 환경에 무방비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다.

올해 6월에도 어김없이 전남 담양 수북 어느 들판에서 왁자지껄 ‘깬지깬지 모내기 소동’이 벌어졌다. 그 소동은 처음 2004년 모내기 퍼포먼스라는 이름을 달고 시작되어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는 특별한 행사다.

<땅과 예술> 수업으로 진행된 ‘모내기 퍼포먼스’를 기획한 박문종 화가는 이야기한다. ‘그림 그리는 것과 농사짓는 행위가 닮아 있다’. ‘농사만 한 예술도 없고 예술창작·예술교육도 농사짓는 일과 진배없다’고 말이다.
땅에서 이루어지는 모내기는 인간이 자연에 개입하는 최소한의 행위로도 볼 수 있다. 자연의 이치를 거르지 않고, 그렇다고 사람이 자연에 소외되지도 않고 인간이 자연에 조응하는 가장 문화적인 행위다.
이 ‘모내기 퍼포먼스’처럼 ‘자연, 문화, 삶 그 자체가 예술’이라는 경지를 체험하고자 만든 박문종 화가의 <땅과 예술>수업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림을 농사 짓 듯 할 순 없을까?”라는 고민으로 출발한 <땅과 예술> 수업은 2012년 모내기 퍼포먼스를 시작으로 올해까지 8년간 이어지고 있는 어린이 문화예술교육이다.

정민룡 <땅과 예술 수업>에 대한 소개를 부탁합니다. 특히 선생님의 작품에서도 모내기, 논이 자주 등장하는데 <땅과 예술> 수업도 그와 어떤 연관성이 있는지를 중심으로 설명해주세요.

박문종 논에서 이루어지는 인간의 노동활동이 생산 활동으로 이어지고 어떤 결과물을 내오는 것처럼 이것을 예술로 치환해서 생각하자면 논이라는 풍경, 배경, 장소에서 이루어지는 자연스러운 신체적 활동, 표현활동이 <땅과 예술>이라는 예술수업의 핵심입니다. 얼마 전 모내기 퍼포먼스를 보았을 때 아이들은 모내기의 경험이 없었어도 흙탕물이 진탕인 논에서 의 활동을 아무런 거리낌이나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장난(?)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습니다. 이것은 오히려 의도된 미술수업이라기 보다는 아주 기초적인 몸의 경험을 제공합니다. 그것이 <땅과 예술> 수업입니다.

정민룡 <땅과 예술>수업을 소개할 때 선생님은 보통 예술교육에서 흔히 쓰는 용어인 ‘미술놀이’, ‘자연놀이’라는 표현이 아니라 ‘흙장난’, ‘물장난’이라고 소개하는데 그 이유가 무엇인지?

박문종 제 생각에 그동안의 미술교육은 자연에서 자유롭게 뛰어 노는 과정을 통해 자연스럽게 미적 경험을 즐기기보다는, 예술 표현력 향상, 창의성 고양이라는 교육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이자 수단으로 놀이를 적용하고 있다는 한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저는 이 한계를 뛰어 넘고자 하였습니다. 그냥 놀이 자체가 교육의 과정이자 목적이 되었으면 합니다.
놀이가 극대화되면 장난으로도 발전한다고 저는 보고 있습니다. 놀이가 장난이 되면 더 접근하기 쉬워지고, 장난으로부터 출발하면 굳이 예술의 의도성을 강조하지 않더라도 예술표현이 훨씬 더 재미있고 흥미로워지며 자연스러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예술은 교과서적인 표현과 지식보다는 정의되고 지시되지 않는 자유로운 상황에서 더 풍부해 질 수 있습니다. 예술을 대할 때 장난기 어린 태도가 오히려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발상, 자유로운 상상력을 유도하는 실험적 시도와 도전을 가능하게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술 수업도 아이들의 무구한 장난과 같은 행동을 수용했을 때 예술의 우연성, 비의도성, 실험성을 경험하게 해주지 않을까하는 생각으로 놀이를 ‘물장난, 흙장난’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정민룡 박문종 선생님은 ‘땅그림’, ‘물그림’이라는 독특한 수업방식을 고수하고 있는데 이러한 수업방법이 어떠한 의미를 갖고 있는지?

박문종 보통의 한국화 화가라면 흐린 날, 비오는 날은 그림을 그리지 않거든요? 왜냐면 종이가 축축해지면 같은 선을 그려도 자신이 의도하는 묘법(선이나 점)이 나오지 않기 때문인데 나는 오히려 맑으면 탁하게, 유려한 것은 거칠게 등 기존의 회화적 틀, 요소들의 반대되는 시도를 하곤 합니다. 이것은 기존 회화의 고정관념을 벗어나 예술을 넘어 가장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표현방식을 저의 표현으로 끌어들인 것입니다.
아이들의 땅그림, 물그림이라는 방법 역시도 장난스럽게 편하게 다가가게 하여 근본적인 표현 욕구를 자극하기 위한 방편이었습니다. 어쩌면 ‘삭힌 홍어는 냄새나고 꾸리한 맛인데 왜 좋아할까?’ 라는 질문을 생각해 본다면 그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굳이 의식하거나 의도하거나 따지지 않더라도 내 주변 사람들이 이미 오래전부터 먹고 있었고 누군가는 그것을 따라 먹었고, 냄새에 익숙해지면서 그냥 자연스레 수용하는 음식문화가 되는 것처럼 땅그림, 물그림도 가장 원초적인 재료와 도구, 자연 환경에서 이루어지며 누구나 예전부터 쉽게 수용해왔던 표현문화이지 않을까 해서 수업에 적용하였습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을 통해 맑은 느낌의 수채화와 같은 그림 뿐 아니라 칙칙하고 탁한 느낌의 작업까지도 받아들이고 있다. 이것이 오히려 감성의 폭을 풍부하고 넉넉하게 넓히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아이들에게도 항상 예쁘고 사실적인 표현, 맑은 느낌의 그림만이 예술이 될 수 있다는 기존 예술에 대한 고정된 감정이 아니라 (비록 편린으로 땅과 예술 수업에서만 적용되지만) 이렇게 탁하고 거칠어도 예술이 될 수 있다는 약간의 충격요법을 주는 방식을 고수한다. 물론 나중에는 이러한 기억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짧은 순간의 흥미롭고 강한 경험과 느낌을 그대로 간직할 수만 있다면 자연과 예술을 대하는데 있어 다양성과 다원성을 인정하고 삶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순기능의 역할을 하지 않을까?

자연물이 생겼다가 사라지는 것처럼 땅그림, 물그림도 절대 흔적을 남기지 않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바로 자연의 이치를 그대로 따라서 하는 것. 항구적으로 남길 수도 있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있는가? 날마다 느끼는 감성에 따라 살 듯, 마찬가지로 작은 동식물, 하루살이와 같이 하루가 일생인 것 같은 경험을 주는 것이 의미가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정민룡 아이들에게 선생님의 호칭이 화가 할아버지로 불리는데...

박문종 보통의 예술교육 현장에서는 주로 젊은 선생님이 많은데 저는 그에 비하면 연배가 많은 편입니다. 외모도 한 몫 한 것 같습니다. 할아버지 모습이고 실제적인 나이로 보더라도 아이들의 부모보다는 훨씬 많으니까요. 아직 할아버지로 불릴 나이는 아니지만 일종의 친근감의 표현일 수 있겠죠.
아이들과 세대 차이도 많이 납니다. 세대 차이가 아니라 시대 차이가 난다고 볼 수 있죠. 우리가 컸던 시대의 개념과는 아주 많이 다르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예술 교육을 한답시고 아무런 자격이 없는 제가 아이들을 데려다가 함께 하는 일, 내 시대로 본다면 가당치 않은 짓이죠.
하지만 현재 이것이 가능하게 된 것은 나와 아이들이 서로 주고받는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 저의 경우 아이들의 감수성과 그들의 문화를 적응하며 익힌다고나 할까요? 저와는 달리 아이들은 자신의 감수성을 확장시키려는 의지가 더 강한 것 같아요. 또 한편으로 아이들이 갖고 있지 않은 정서를 제가 갖고 있다고 볼 수도 있고. 서로의 시대 감수성을 맞바꾸는 것이죠. 마치 할아버지와 손주가 동시대에 살면서도 할아버지가 손주를 통해 희망을 찾는 것과 비슷합니다.
나 같은 할아버지는 저물어 가는 인생이지만 아이들을 통해서 희망을 찾고 있다고 생각한다면 과장일까요? 실제로는 미래가 보장되지 않지만 손주들의 행동과 모습을 통해 미래가 보장된 것처럼 느껴지는 것. 미래를 보상을 받는 느낌 같은 거요.

정민룡 선생님의 어떤 예술철학이 땅과 예술 과정에 녹아들어 있는지?

박문종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라는 고민 선상에서 <땅과 예술> 수업을 시작한 것 같습니다. 그전에는 산수화, 인물화를 열심히 그렸고 치열하게 예술의 삶을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90년대를 넘어오면서 나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습니다. ‘내가 잘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남들과 다른 예술창작이 무엇일까?’
미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상식, 회화적인 표현 방법과 다른 것은 무엇일까? 그런 방법론을 찾는 과정에서 농촌에 관한 모든 것들, 땅에 대한 집착이 생겼고 표현방식에 있어 흙을 쓰는 것들이 결정적인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내가 배웠던 도제식 교육에서는 반드시 물감이 있고 꼭 그것을 써야 하고 먹을 써야 하는 원칙을 지켜야 했습니다. 만약 종이에 흙이 닿는다면 이물감이 있는 것으로 여겨 올바르지 못한 표현 방식으로 생각하는데 오히려 이를 수용하면서부터 저의 그림이 달라졌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꼭 농촌에 들어와서 그림이 바뀐 것은 아니었고, 도시의 작은 작업 공간에서 방법론에 심취하다 보니 물감 대신 흙을 써도 괜찮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입니다.
오히려 도시에 살면서 상상으로 근접촬영을 하듯이 농촌에서의 예술 개념을 만들어 냈습니다. 한 발짝 물러나야 더 멀리 볼 수 있듯이, 지금 농촌에서 살 때보다 이전 도시생활로부터 자연과 농촌에 천착하는 작품을 만들어 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던 차에 아이들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표현도 복잡한 내적구조를 통해서 나옵니다. 아이들은 생각이 맺혀 있다가도 반드시 이를 촉진시켜 주는 요인이 있어야만 자기표현으로 자연스럽게 나올 수 있습니다. 그 촉진 요인이 바로 자연이고 <땅과 예술>이라는 예술교육이었습니다. 아이들은 결코 주저하지 않더라고요. 표현하는데 있어서 만큼은요.
저의 경우에 ‘나는 무얼 그릴까?’하고 맨날 생각만 했지 계속 주저했습니다. 그릴 수 있는 것과 그릴 수 없는 것을 판단하기 위해서요. 이러한 부담들이 아이들을 만나면서 편해졌다고 할까요? 저의 작업은 지금도 마찬가지로 형상이 있으면 그 형상에 집착합니다. 아이들도 역시 집착을 하거든요. 이것은 저와 같은 예술가나 아이들이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예술에 대한 기본 태도입니다.
자연을 멀리보고 가까이 다가가서 자세히 보고 집착하는 것.
잘 그리고, 못 그리는 것을 가려내는 것이 아니라 이를 다 포용하는 마음을 <땅과 예술>에서 배웠습니다. ‘잘하고 못하고 되고 안 되고’ 의 경계를 허무는 것, 예술교육이 단지 예술적 표현을 배우는 차원을 넘어서는 다른 문제인거 같다고 느낍니다.

박문종 화가의 수업에서 대하는 자연은 단순히 오브제가 아니다. 자연 그대로 그냥 수업의 환경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인다. 마치 모내기 하듯 아주 최소한의 개입이 있을 뿐이다. 자연을 대하는 겸손한 태도라고 말할 수도 있다. 자연을 단편적인 예술의 오브제, 재료나 도구, 물리적 환경으로만 한정하지 않는다.

자연의 재료는 무궁무진하다. 물, 바람, 햇볕, 땅, 흙, 나무, 들, 하늘 등등. 이러한 자연의 재료를 감각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땅과 예술>수업의 방식이자 자연에 대한 최소한의 개입이다. 자연의 모든 색깔이 물감이 되고 땅이 캔버스가 된다. 중요한 것은 자연을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내버려두듯 아이들도 자연 환경에 무방비로 내버려 두는 것이다. 그것은 자유다. 하지만 그것에는 저마다 다 이유가 있다. 그는 이를 ‘까닭 있는 자유’라고 말한다. ‘자유’는 자연과 예술을 수용하는 아이들의 태도이며 ‘까닭’은 아이들이 자연에서 예술을 배우는 이유이자 철학, 나아가서는 예술교육 방법론을 말한다. 마지막으로 <땅과 예술> 수업의 한 광경을 묘사한 박문종 화가의 글을 소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