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이곳에 있다 이곳에 있다

대장간의 봄날

김도연 / 강원일보,경인일보 신춘문예 당선, ’19.4月

대장이 되고 싶었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세상엔 사라져가는 대장간보다 흥미진진한 게 넘치게 많았으니까

그렇게 오래 잊고 지냈던 대장간을 목련이 피어나는 봄날 춘천의 소양로에서 다시 만났다.

대장이 되고 싶었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세상엔 사라져가는 대장간보다 흥미진진한 게 넘치게 많았으니까 그렇게 오래 잊고 지냈던 대장간을 목련이 피어나는 봄날 춘천의 소양로에서 다시 만났다.

어린 시절 마을의 대장간은 늘 신기한 곳이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집을 대장집, 대장장이를 대장, 그의 아내를 대장댁이라 불렀다. 산골마을의 대장간이라 그런지 모양이 번듯하지는 않았다. 마당 귀퉁이에 헛간처럼 지어놓았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그곳을 지나칠 때면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웃거리곤 했다. 단단한 쇠를 녹여 무엇인가를 만든다는 게 신기하기 이를 데 없었다. 아버지나 엄마가 주문한 낫이나 식칼을 찾아오라고 할 땐 다른 어떤 심부름보다 신이 나서 한달음에 뛰어갈 정도였다. 왜냐하면 좀 더 많은 과정을 눈치 보지 않고 구경할 수 있었기에. 화덕에서 피어오르는 빨간 불, 그 화덕에 바람을 불어넣는 풀무, 벌겋게 달궈진 쇳덩이를 땅 땅 내려치는 메질, 달아오른 쇠를 물통에 담글 때 피어나는 연기……

그러다보면 어느새 쇳덩이가 낫이나 식칼로 변신을 하니 그야말로 신통방통한 일이었다. 대장집이 부러운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대장집의 자식들은 다른 아이들과는 격이 다른 놀이기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겨울철 나무스키에 장착한 바인딩이며 얼음썰매의 날은 튼튼하고 맵시가 있고 성능 또한 뛰어났다. 반면 우리들의 스키나 썰매는 정반대였기에 어린 시절 내 꿈 중의 하나가 바로 대장이 되는 것이었다. 호칭도 얼마나 근사했던가? 나는 뜨거운 불에 쇠를 녹여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무엇인가를 구슬땀을 흘리며 만들고 싶었다.

그러나, 나는 오랫동안 대장간을 잊고 살았다. 마을의 대장간도 사라졌다. 마을 밖의 대장간들도 빠른 속도로 사라지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공장에서 기계로 연장들을 대량으로 찍어내는 시대가 되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값싼 중국산 연장들이 시장을 잠식해버렸다. 또 한 가지 이유를 꼽는다면 아마도 농업 인구의 감소와 농업의 기계화다. 이 모든 여파로 인해 우리 대장간이 설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은 사양길에 접어든 대장간을 모른 척하고 지나쳤다. 대장간에 가지 않아도 그리 불편한 게 없으니까. 나 역시 그러했다. 대장이 되고 싶었던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세상엔 사라져가는 대장간보다 흥미진진한 게 넘치게 많았으니까. 그렇게 오래 잊고 지냈던 대장간을 목련이 피어나는 봄날 춘천의 소양로에서 다시 만났다.

대장간의 상호는 강동 대장간이었다. 대장장이 박경환씨가 잠시 자리를 비운 대장간을 설레는 마음으로 둘러보았다. 갈탄을 연료를 쓰는 화덕, 풀무의 역할을 하는 전기 송풍기, 그 옆에 걸려 있는 여러 집게들, 담금질을 할 때 쓰이는 물통, 큰 모루와 작은 모루, 숫돌과 연마기들, 그리고 망치들. 유리창 앞에는 호미, 목낫, 괭이, 곡괭이, 자귀, 식칼, 도끼 들이 진열돼 있었다. 전면 벽에는 노동부 지정 ‘기능전수자의 집’이란 명패가 먼저 눈에 들어왔고 그 옆에 걸린 엿장수 가위, 산돼지를 사냥할 때 쓰는 창날, 갈고리, 예전에 사용했던 나무 문패(대장간이라고 먹으로 쓴)가 걸려 있었다.

이 대장간은 대장장이 박경환씨의 아버지인 고 박수연씨가 1963년에 처음 문을 열었다. 박수연씨는 2005년 정부로부터 기능전승자로 선정되었다. 박경환씨는 아버지의 업을 이어받은 것이었다. 쉬운 결정이 아니었을 것이란 짐작을 하며 큰 모루에 새겨진 자국들을 눈여겨보고 있을 때 박경환씨가 외출에서 돌아왔다. 인사를 나누며 슬쩍 인상을 살폈는데 역시나 예사롭지 않았다. 고독한 대장장이의 길을 고수하는 어떤 고집이 그의 얼굴에 무쇠처럼 덮여 있었다. 자, 이제 그의 이야기와 그가 쇠를 달구고 두드려 만드는 것들을 지켜보자. 벽에 걸린, 유리에 그을음이 가득한 둥근 시계의 바늘은 어느덧 정오를 넘어서고 있었다. “호미를 만들어 볼게요.”
그는 건목이라고 부르는, 한 자 조금 더 되어 보이는 길이의 무쇠 두 개를 가져왔다.

건목은 물건을 만들 때 다듬지 않고 대강 형태만 만들어놓은 것을 부르는 용어라 한다. 모양을 내려고 그 건목을 그라인더에 가져가자 전체적으로 침침했던 대장간은 불꽃놀이를 하듯 순식간에 환해졌다. 이어 송풍기 전원을 올리자 화덕의 갈탄이 벌겋게 피어오르기 시작했다. 두 개의 호미가 될 무쇠 덩어리는 생선처럼 화덕 위에 올라갔다. 화덕의 온도는 1500도를 넘나드는데 그 열기에 무쇠가 녹아 시뻘겋게 변했을 때 비로소 메질을 시작할 수 있었다. 유능한 대장장이는 달구어지는 무쇠의 색깔만 봐도 메질의 시기를 가늠할 수 있을 터였다. 무쇠가 화덕 위에서 녹는 동안 그는 호미의 자루 이야기를 꺼냈는데 내 예상과 달리 자신은 버드나무를 사용한다고 했다. 버드나무는 약해 보이지만 물기에 썩지 않고 마르면 단단해지고 또 갈라지지 않는단다. 다래나무와 우리 고유의 자작나무도 괜찮다고 한다. 수입한 목재 대신 우리 목재를 직접 깎아서 사용한다고 말하는 그의 표정에 어떤 결기가 슬쩍 비쳤다가 사라졌다. 물건이 거지 같이 나와도 내 물건만 판다는 신념을 토로할 땐 슬쩍 겁이 날 정도였다. 그때, 미용실에서 머리를 하다 대기 시간에 나온 듯한 할머니 한 분이 머리에 비닐 모자를 뒤집어쓴 채 들어왔다. 할머니는 자그마한 식칼 하나를 고른 뒤 찾으러 올 시간을 확인한 뒤 대장간을 나갔다. 다행이었다. 화덕의 갈탄은 발갛게 피어올랐고 그 위에 놓인 무쇠는 용암처럼 변해 있었다.

호미란 무엇인가. 논밭의 김을 매거나 감자나 고구마를 캘 때 사용하는 연장이다. 옛날에는 동서(東鋤), 즉 동쪽나라의 호미라고 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연장이다. 세 변의 길이가 각기 다른 삼각형 모양의 한쪽 모서리에 목을 이어대고 거기에 자루를 박은 독특한 형태가 바로 호미다. 용도에 따라 다양한 모양새가 있는데 강원도의 양귀호미는 날이 크고 날 끝이 평평하다. 자루도 길고 전체적으로 무겁다. 날이 평평한 것은 토양이 척박해 잡초의 뿌리가 땅속으로 깊이 들어가지 않기 때문에 겉흙만 긁어도 김을 맬 수 있기 때문이다. 밭에 돌이 많고 흙이 거칠기에 그것을 이기려면 날이 무겁고 자루도 길어야 한다. 어린 시절 우리는 호미를 호맹이라 불렀는데 헛간의 처마 밑에는 조금씩 모양이 다른 호맹이들이 줄줄이 걸려 있었다. 그것뿐인가. 대장간에서 만든 각종 농기구들이 다양하게 구비돼 있었는데 그 이름과 모양을 익히는 것도 고된 일이었다.

다시 대장간으로 돌아가 대장장이 박경환씨의 호미 이야기를 들었다. 호미를 만들 때 가장 중요한 점은 흙속으로 들어간 날이 흙을 안고 가냐 가르고 가냐이다. 안고 가면 힘이 들고 가르고 가면 편하다. 앞날은 흙을 안아야 하고 뒷날은 갈라야 한다, 그래서 앞날과 뒷날의 형태를 트집 잡는 게 쉽지 않다고 한다. 각이 조금만 틀어져도 힘이 비효율적으로 들어간다고 덧붙였다. 그는 여러 연장 중 만들기가 가장 어려운 게 호미인데 아버지가 만든 호미가 최고라고 칭송했다. 강원도의 호미를 산전호미라 부르고 특징은 슴베가 짧다고, 그래야 힘을 쓴다고. 마침내 트집 잡기가 시작됐다. 화덕에서 꺼낸 무쇠를 집게로 집어 모루 위에 올려놓고 망치로 두드리기 시작한다. 세 번에 걸쳐 해야 하는데, 첫 번째 일은 호미의 목 부분을 두드리고 다듬는 일이었다. 그 다음에 적당한 각도로 목을 구부렸다. 무쇠를 잡는 집게는 물건의 크기에 따라 고른다. 불의 색깔을 보고 화덕에서 무쇠를 꺼내 메질을 하는데, 호미는 보통 여섯 개 정도를 동시에 작업한다. 붉게 달구어진 무쇠를 이리저리 돌려 식기 전에 모양을 잡는 일이 바쁘게 이어졌다. 그러다 붉은 빛이 사라지면 다시 화덕에 올려놓고 다음 무쇠를 꺼내 같은 작업을 반복한다. 목이 만들어지면 다음 일은 날을 만들기 위한 메질이 시작된다. 그는 그 작업을 본 트집을 잡는 일이라고 했다. 침대는 가구가 아니라 과학이라는 광고도 있지만, 내가 볼 때는 호미가 과학이었다. 뾰족한 앞날과 뭉툭한 뒷날의 묘한 각도, 구부러진 목과 날 사이의 거리(한 뼘 정도), 날의 수평…… 작은 호미 하나에 너무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하는 과정이었다. 호미의 날과 목을 완성한 뒤 마지막으로 화덕에서 달궈지는 부분은 슴베였다. 그는 붉은 쇠창살 같은 슴베를 댕기 두른 자루에 꽂았다. 나무 타는 연기가 와락 피어났다. 그리고 꺼냈다. 까닭을 물으니 1차로 길을 만드는 과정이라고 했다. 아, 한 번에 꽂아버리는 게 아니구나!

쇠를 달구어 온갖 연장을 만드는 곳이 대장간이다. 대장장이는 누구인가. 옛날에는 대장장이가 되려면 일하는 사람 옆에서 부채질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다음엔 풀무질, 이어서 망치질(메질), 집게질로 옮겨갔는데 근 10년을 해야 이름 석 자를 내걸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화가 김홍도의 그림 중에도 대장간 풍경이 있다. 그 그림에는 모두 다섯 명의 사내가 등장한다. 풀무질을 하는 소년, 집게로 모루에 올려놓은 무쇠를 잡고 있는 사내, 쇠망치를 들고 메질을 하는 사내 둘, 마지막으로 숫돌로 낫을 갈고 있는 청년. 아마 대장간이 전성기를 누리던 시절의 풍경일 것이다. 대장장이는 청동기의 출현과 동시에 등장했다. 기록상으로는 신라시대부터 등장하는데 철을 주조하는 관서가 따로 있어 무기, 생활용품, 농기구 등을 제작했다. 이후 고려와 조선으로 이어졌는데 하는 일의 세분화도 함께 진행되었다. 조선후기에 와서 무쇠를 다루는 일인 수철장(水鐵匠)만을 대장장이라 일컬었다. 대장장이는 관청에 소속되었는데 일반 일도 같이했으며 이후 일반 일이 압도적으로 많게 되었다. 다시 말해서 대장장이는 아주 오래 전부터 쇠붙이를 다루는 장인이었다. 쇠를 다루는 정신과 얼을 온몸에 새기고 있는 사람인 것이다. 비록 산업구조의 개편으로 대장간의 일들이 거의 대부분 대량 생산 체제의 공장으로 편입됐지만, 이 세상에는 아직도 단단한 쇠를 녹여 메질과 담금질을 하는 고집 센 대장장이가 있는 법이다. 어쩌면 그게 이 세상의 숨통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지타산이 맞지 않아도, 손목과 팔꿈치 어깨가 아파도, 묵묵히 무쇠를 녹이는 대장장이, 아니 대장.

대장장이 최경환씨는 아버지 곁에서 메질을 10년 가까이 했다. 그의 지론 중 하나는 메질하는 것만 봐도 실력을 알 수 있다고. 그는 메질을 하는 동안 파스로 온몸을 도배하며 살았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운영하는 대장간 옆에서 낚시가게를 했는데 가끔 들여다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메질을 하게 되었다. 아마도 아버지의 고단수 의중에 낚인 게 분명해보였다. 하지만 꼭 그것만은 아닐 것이다. 그는 태어날 때부터 대장의 아들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그 힘이 그를 끌어들였을 것이고, 그 또한 기꺼이 응했을 것이다. 소양로에 위치한 강동 대장간의 주요 고객은 춘천 서면 사람들이었다. 가까운 곳에 서면과 춘천을 연결하는 나루터와 번개시장이 있다. 한때는 손님들이 줄을 설 정도였다. 당시 소양로에만 다섯 개의 대장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중국산과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어내는 농기구가 철물점에 등장하면서 대장간의 수제품은 가격경쟁력을 잃기 시작했다. 결국 신물이 나서 3년 정도 쉬기도 했다. 그 기간에 그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어떤 이유로 다시 대장간 문을 열었을까. 추측하건데 그를 일으켜 세운 건 고집과 자부심일 것이다. 철물점에 가면 낫 하나의 가격이 얼마인데 여긴 왜 이렇게 비싸냐는 손님들의 불만에 그는 정면으로 맞섰다. 정성을 다해 물건을 만들고 일한 만큼 돈을 받는다. 그가 칼 한 자루, 낫 한 자루를 만드는 과정을 지켜본 사람들은 고개를 끄떡였다. 나 역시 고개를 끄떡인 뒤 그에게 미래를 물었다. 그는 대장간 박물관과 작업장, 실습공간이 함께 있는 공간을 꿈꾸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부디 그 꿈을 이루었으면 좋겠다. 아니, 그 꿈은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한다. 그곳은 이 세상의 숨통 중 하나일 테니까.

대장간을 나서려고 할 때 그는 비로소 할머니가 부탁한 식칼을 잡았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식칼의 탄생을 지켜보고 싶었다. 어느 정도 완성된 식칼을 연마하는 과정이었다. 먼저 굵은 그라인더로 불꽃을 튕겨내며 칼날을 갈았다. 그 다음엔 부드러운 연마기. 이 공정이 위험한데 그는 지금껏 세 번이나 다쳐 손가락을 꿰맸다. 물이 흐르는 연마기 위에 날카로운 칼날을 올려놓고 손으로 지그시 누르는 장면은 내가 보기에도 아슬아슬했다. 그때 칼을 주문한 할머니가 대장간으로 들어와 함께 지켜보았다. 다음은 숫돌이다. 담금질용 물통에 담겨 있던 숫돌을 꺼내 다시 칼을 갈았다. 마지막으로 아주 섬세한 그라인더로 마무리를 했다. 고가의 칼은 여기에 숫돌 두 단계가 더 들어간다고 한다. 자, 이제 시험만이 남았다. 그는 칼날에 종이를 가져갔다. 소리 없이…… 종이가……… 잘려나갔다. 종이에 의식이란 게 있다면 아마 잘라진지도 모를 것 같았다. 나도 따라해 보았다. 스윽, 내 마음에 금이 가는 소리……

강동 대장간을 나와 소양로를 터벅터벅 걸었다. 배가 고팠다. 목련이 피어나는 봄날이었다. 걷다 보니 파헤쳐진 도심 한가운데에 칠층석탑 하나가 외로이 서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