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생각과 마음을 잇다 생각을 잇다

옥수수의 노래 - 문화예술교육을 다르게 생각하기

옥수수의 노래

문화예술교육을 다르게 생각하기

채효정 / 잇다 편집위원, ’19.4月

문화운동, 예술활동도 그런 것으로 상상해보면 좋겠다.

뭔가 모범 시민, 교양 시민의 자세로 문제를 치유하려는 해결사의 관점에 서지 말고

문제를 새롭게 만들면서 계속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제의 창조자가 되어보자. 얼마나 신나고 재밌겠는가.

문화운동, 예술활동도 그런 것으로 상상해보면 좋겠다. 뭔가 모범 시민, 교양 시민의 자세로 문제를 치유하려는 해결사의 관점에 서지 말고 문제를 새롭게 만들면서 계속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제의 창조자가 되어보자. 얼마나 신나고 재밌겠는가.

‘문화예술교육’이란 뭘까. 말의 힘은 세다. 문화라는 말도 힘이 세고, 예술이라는 말도 힘이 세고, 교육이란 말도 힘이 세다. 이 셋을 합쳐 놓았으니 오죽하랴. 듣는 순간 어떤 힘에 마음이 억눌리고 답답해진다. 누구나 문화와 예술의 창조자가 될 수 있고, 삶을 아름답게 만드는 장인, 기술자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그런 활동들을 지원하려 한다는데, 그런 지원 기관의 의도와 정반대로 이 말 자체가 억압적으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다. 왜 그럴까. 언어가 단순히 의미를 전달하는 중립적 도구가 아니라 현실의 힘들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문화가 위에서 아래로, 예술과 지식은 아는 사람에서 모르는 사람에게로 흐른다는 것은 현실의 압력이다. 문화나 예술이라는 말도 어떤 사람들에겐 힘이 되지만 반대로 어떤 사람들에게선 힘을 박탈한다.

말의 힘은 현실의 권력관계와 문화의 지배력을 반영하고, 문화적 위계를 계속 재생산한다. 그 재생산을 담당하는 것이 교육이다. 문화예술교육이라는 개념은 문화 있는 자와 문화 없는 자, 높은 문화와 하층 문화, 주류 문화와 비주류 문화, 고급 예술과 대중문화의 위계를 전제하고 있다. 그래서 행정기관으로서 문화재단이 이런 이름으로 사업명을 계속 가져가는 한, 그 이름으로 무엇인가를 하려는 사람들은 그 말의 힘이 가진 장력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한계라고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화 행정이나 일선 현장에는 그 틀을 벗어나보려는 사람들의 분투가 있다. 이 글은 강원도에서 ‘문화예술교육’이란 이름 속에서 활동하고 있고, 활동하려는 사람들이 그 말의 힘에 억눌리지 않고 의미를 확장하고 유연하게 해석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며 쓴 글이다.

문화와 문명

먼저 문화란 말에 주눅 들지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는 보통 문화와 문명을 잘 구분하지 않거나 문명화를 문화로 착각한다. 하지만 문명과 문화는 다르다. 문명(civilization)이란 말은 그 말이 그대로 보여주듯이 도시화이며, 여기에는 서구화, 산업화, 발전과 진보의 의미가 담겨있다. 문명과 야만의 구분은, 도시와 농촌을, 서구와 비서구를, 발전과 저발전 지역을, 진보와 낙후를 나누는 기준을 설정한다. 따라서 문화를 문명의 관점에서 이해하면 자연, 농촌, 비서구, 저발전, 낙후 지역은 곧 문화가 없거나 문화적 수준이 낮은 곳으로 이해된다. ‘문화소외지역’이나 ‘열악한 문화 환경’과 같은 표현은 그런 의식을 반영한 표현이다. 하지만 그때 우리가 떠올리는 문화라는 것은 실은 도시문화, 산업문화, 소비문화에 가까운 것이다. 오페라 하우스나 콘서트 홀, 박물관과 미술관, 복합영화상영관 등 우리가 ‘문화적 풍요’로 떠올리는 것들 대부분은 대도시라는 거대 소비 지역의 문화이며, 규모의 경제에 맞는 규모의 문화산업이다. 이런 문화를 향유하는 계층은 대부분 도시의 중산층들이다. 그런 기준에서 보자면 소도시와 소읍 지역, 그리고 자연과 시골이 대부분인 강원도 지역은 ‘문화가 없는 곳’이 된다.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보면 다양하고 풍요로운 문화적 환경이라는 것도 외형은 풍요해보이지만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것은 아니고, 거리의 근접성은 좋아보여도 계급적 접근성은 불평등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러니까 우리가 느끼는 문화적 소외감의 근본 이유는 실은 문명생활을 누리지 못하는 데서 오는 불편함과 부족함, 그리고 문화를 어떤 특정한 문명을 기준으로 서열을 매겨놓고 그에 못 미치는 이들이 열등감을 느끼도록 만드는 문화적 획일성과 상징폭력 때문이다. 지금 우리 시대는 서구 도시 중산층 시민들의 문화가 그 모든 지역의 문화들의 준거점이 되어 있다. 그리고 기준을 충족하는 사람들이 문화인, 교양인으로 대접을 받는다. 문학과 예술과 철학 같은 것들이 그 교양의 주 내용을 이루는 것이고, 언젠가부터 시민을 대상으로 유행처럼 번져온 소위 인문학 교육이라 하는 것은 모조리 그런 ‘교양 시민 만들기’에 맞춰져 있다.

문화예술교육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그렇게 하면 강원도의 문화예술교육은 황새 따라 하려다 가랑이 찢어지는 뱁새가 되기 십상이다. 무엇보다도 문화라는 것의 개념과 실천은 소득이나 생산성 같은 경제적 지표처럼 단순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척도로 잴 수 없는, 아니 척도를 들이댈 수가 없는 것이 인간의 문화인 것이다. 풍토와 환경이 다른 곳에는 당연히 다른 문화와 다른 역사가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 ‘다름’을 종종 ‘결핍’으로 이해한다. 많은 기획들이 결핍을 채우거나 보완하는 것에 초점을 두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다. 자연이나 농촌을 또 하나의 문화로 이해하지 못하고 문화의 결핍 상태로 바라보게 되는 것이다. 그러면 있는 문화도 보지 못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그런 관점에서 문화예술교육을 생각하게 되면 ‘교양을 길러주고’ ‘문화적 소양을 높여주는’ 프로그램 밖에 나오지 않는다. 교육 환경과 대상은 열악한 대상을 선정하고 교육 주체와 방법은 외부로부터 가져온다. 물론 기획자들은 ‘그들을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사업취지를 ‘여성들을 위해서’ ‘농촌 주민을 위해서’ ‘다문화 가정을 위해서’ ‘노인들을 위해서’ ‘청소년을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하지만 그럴 때 교육은 원조가 되고 문화예술교육은 복지 사업이 된다. 지역 문화예술활동을 기획하면서 그 목표나 효과를 ‘현대인의 소통 부재를 극복할 수 있는 연결’이 된다든가, ‘세대 간 갈등을 해결’한다든가, ‘여성의 자존감을 고취’ 한다는 식으로 원대하게 설정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다. 하지만 그런 원대한 목표는 달성될 수 없을뿐더러 문화와 예술을 꼭 그런 사회문제 해결의 수단으로 여기는 것이 옳은지도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무슨 일이든 ‘해야 한다’는 당위의 요청이 지배적이게 되면 재미가 없어진다. 예술 활동이라는 영역에서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재미만 있고 공공성이 없으면 그것도 문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할까?

사업이라 쓰고 활동이라 읽는다

먼저 ‘사업’이란 말을 ‘활동’으로 바꾸어 생각하자. 사업과 활동은 큰 차이가 있다. 사업은 우리를 기업가(사업가)의 관점에 서게 한다. 기업가의 관점은 ‘경영’의 관점이다. 그러면 지원금은 ‘투자금’이 되고, 기획자는 투자 유치를 받아 사업을 착수하고 성과물을 남기는 ‘문화사업자’가 된다. 이런 관점에서는 기획서와 보고서가 우선하고, 기획서의 빈칸에 채워 넣을 프로그램을 중심으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음악, 미술, 연극, 글쓰기 같은 장르별 실기 교육을 지원사업 취지에 맞게 설정된 사업목표와 기계적으로 결합시키는 기획이 나오게 된다. 각종 지원사업에 이런 ‘업자의’ 관점으로 참여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문화 기획자’, ‘문화 사업’, ‘예술 경영’ ‘문화 혁신’ 같은 용어들 모두 기업 경영의 관점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문화‘사업’이 아닌 문화‘활동’의 관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그런 거대 엔터테인먼트 기업들이 생산하고 유통시키는 상품화된 문화형식과 획일적인 소비를 조장하는 자본주의 대중문화에 어떻게 저항할까 라는 고민에서 시작하는 것이다. 주류에 대한 비주류의 문화, 세계 문화에 대한 지역 문화, 도시 문화에 대한 시골의 문화, 규모의 문화에 맞선 소수자들의 작은 문화적 실천이 ‘활동’이란 말 속에는 담길 수 있다. 하지만 ‘사업’이란 말은 투입과 산출, 기획과 결과물, 성과와 효율성을 먼저 그리고 계속 생각하게 한다. 그러니 ‘사업’의 의미는 어디까지나 문화재단의 ‘지원 사업’이란 의미로 받아들이고 그러나 현장에선 ‘사업’이 아니라 ‘활동’을 해나가자. 그래야 그걸 하는 사람도 문화활동가, 예술활동가가 된다. 그러니 사업이란 말을 지우고 활동이란 말을 가슴에 품자.

교육이라 쓰고 운동이라 읽는다

다음으로 넘어서야 할 말은 ‘교육’이란 단어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무의식중에 교육자와 피교육자 간의 일방적 위계를 설정하기 때문이다. 교육의 의미가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이 땅에서 우리 자신의 교육경험이 대체로 그러했기 때문에 ‘교육 사업’은 늘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경계를 설정하고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지식과 기술의 이전을 교육이라고 생각하도록 한다. 문화예술교육이 문화소외지역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화경험의 확대나 예술실기교육에 중점이 맞춰지는 것은 그 때문이다. 나는 늘 ‘문화소외지역’이란 말을 들을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화가 난다. 그건 어떤 지역을 문화의 ‘후진국’이며, ‘불모지’이고, ‘미개한’ 곳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자기가 사는 곳, 또는 자기가 활동하는 곳을 그런 관점에서 바라볼 때, 과연 그 땅과 사람을 존중할 수 있을까. 교육을 통해 의식의 수준과 삶의 수준을 높이겠다는 계몽주의적 관점은 늘 시혜적 관점과 같이 간다. 누군가를 ‘위해서’ 어떤 일을 해준다고 생각하는 건 그 대상을 선의를 가지고 무시하는 것이다. 그건 육성과 훈육 그리고 통치의 교육 관점이다. 참된 교육은 지식의 주입이 아니라 자기의 변화와 타인의 변화를 촉진하고 그것을 통해 세계의 변화를 가져오는 것이라고 하면, 그런 의미에서의 교육은 근본적으로 ‘운동’일 수밖에 없다. 이 운동을 거창한 사회운동이나 시민운동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동네에서의 소소한 작당이라고 이라고 생각하면, ‘교육 대상’이 아니라 그 작당을 ‘함께 할 사람’들을 찾게 될 거고, ‘성과’가 아니라 ‘변화’를 추구하게 될 것이다. ‘결과보다 과정을 중시한다’는 말은 바로 그런 의미다. 그 과정에 재미와 감동을 부여하는 데 ‘문화’ 또는 ‘예술’이라고 하는 기술과 방법이 필요한 것이다. 문화와 예술은 그 자체로 선이 아니며, 문화 있는 자와 문화 없는 자로 나뉘지도 않는다. 나쁜 문화와 좋은 문화가 있고, 소수만이 향유할 수 있는 예술과 누구나 쉽게 향유할 수 있는 예술이 있는 것이다. 후자를 향한 문화예술‘운동’이 되었으면 좋겠다.

‘홍대 앞’이 없어도 여기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귀촌한 젊은 청년 예술가들을 만난 적이 있다. 시골에는 ‘음악을 향유할 곳’이 없어 음악의 불모지와 같은 땅에 뭔가 음악의 향기를 불어넣고 싶다는 청년들이었다. 열정은 좋게 느껴졌지만 ‘노래 없는 곳’이라는 말에 내가 물었다. 혹시 ‘옥수수의 노래’를 들어보았느냐고. 그 자리에 있는 사람들은 처음에는 대부분 그 질문을 하나의 문학적 비유로 생각했다. 하지만 옥수수는 정말 노래를 한다. 아니 모든 대지는 노래를 가지고 있다. 감자도 노래하고 콩도 노래하며 새도 물고기도 개구리도 노래한다. 엠넷과 유튜브에 우리의 음악적 상상력이 갇혀 있는 동안, 옥수수의 노래와 강물의 노래, 별들의 시를 들을 수 있는 감각이 사라졌을 뿐이다. 산과 들에는 자연과 노동의 리듬이 함께 새겨져 있다.

농촌만이 아니다. 도시에도 도시만의 리듬이 있다. 리처드 세넷은 『장인-현대문명이 잃어버린 생각하는 손』이란 책에서 건축물에 새겨진 장인의 흔적들을 이야기하는데, 그 중에 뉴욕 남동부 빈민가의 거리 풍경을 묘사하면서 그 생동감이 재즈 음악 같다고 표현한다. 하지만 거리에 리듬을 만드는 것 건축 디자인이 아니라 사람들의 활동이다. 빈민층 주거 지역 어느 곳이나 그렇듯이 똑같이 생긴 다세대 주택들이 들어서 있을 뿐인 거리에 주택의 계단은 간이 상점이 되고 빨래줄은 도로 위를 가로질러 걸려있다. 잘 정돈된 중산층 거주지와 달리 떠들썩하고 혼란스러운 거리 풍경이지만 길을 걷다보면 나름의 규칙성이 나타나기도 하고 즉흥성과 우연성이 생동감을 주며 무질서 속의 조화로움을 발견한다. 거리의 행정적 구획과 공간의 정해진 용도에 갇히지 않고 자신들만의 공간으로 재창조해나가는 삶의 리듬은 그것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의 불안정한, 그래서 끊임없이 탈주와 변주를 시도할 수밖에 없는 삶을 닮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획일적 건축물들에 생명력을 부여한 거리의 장인들이었고, 또한 늘 새로운 공간과 시간을 창조해내는 예술가들이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상상력과 일상 궤도의 이탈이 그런 공간들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문화운동, 예술활동도 그런 것으로 상상해보면 좋겠다. 뭔가 모범 시민, 교양 시민의 자세로 문제를 치유하려는 해결사의 관점에 서지 말고 문제를 새롭게 만들면서 계속 다른 삶의 리듬을 만들어내는 문제의 창조자가 되어보자. 얼마나 신나고 재밌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