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삶 속 문화가 핀다

강원도 깊이 읽기, 그 리좀적 사유의 한 조각

김풍기 / 강원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 교수, ’18.11月

사투리에 대한 기억

영화 <변산>(2017)은 여러 모로 흥미롭다. 특히 나처럼 시골 출신 촌놈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요소가 많다. 래퍼 심뻑으로 나오는 주인공 학수가 사투리를 숨기면서 서울내기인 것처럼 행동할 뿐 아니라 스스로 내면화하는 대목에서는 착잡함과 함께 그의 고심에 찬 심정을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자신의 고향을 부정하는 행위는 단순히 래퍼로서 성공하기 위한 욕망에서만 나온 것은 아니다. 영화의 맥락을 보면 여러 가지 요인이 작동하면서 고향을 부정하는 학수의 태도와 행동이 표면화된다. 방언에 대한 학수의 민감한 반응은 동시에 내 청춘 시절을 떠올리게 했다.
나는 강원도 영동지역 산골마을 출신이다. 강원도 사람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영동지역 말씨는 독특한 억양과 단어 때문에 첫마디만 들어도 다른 지역과 구별된다. 말투가 싸우는 것 같다는 평가도 많았고, 고향이 경상도냐는 말도 많이 들었다. 내가 태어나 자란 지역에서 계속 살았다면 몰랐겠지만, 다른 지역으로 가는 순간 내 말투는 금세 표가 났다. 차이를 먼저 느끼는 것은 나 자신이었다. 다른 사람은 무심히 들어 넘기는 말도 내게는 찜찜한 뒤끝을 남겼다.
대학 초년생 시절이었다. 학과의 교수님과 이야기를 나누고 연구실을 나오는데, 교수님께서 웃음 띤 얼굴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앞으로 국어 선생님을 할 사람이 사투리를 쓰면 되겠어?” 어쩌면 어린 제자와 친근해지고 싶은 마음에 툭 던진 농담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사투리가 언어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나에게 그 말은 큰 파문을 일으켰다. 그 길로 나는 고향의 말투를 버리고 표준어를 따르기 시작했다. 다행히 나는 다른 지역 말투를 배우는 좋은 능력이 있었던지 몇 개월이 지나지 않아 친구들은 나의 표준어 구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 말투는 수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유지될 뿐 아니라 더욱 공고해져서 원래 표준어를 구사하는 사람처럼 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고향에 가거나 어린 시절 친구들을 만나거나 혹은 몹시 흥분할 일이 생기면 나도 모르게 고향 말투가 튀어나온다. 어린 시절 몸으로 체득한 말투를 어찌 이성의 통제 하에 완벽하게 둘 수 있겠는가.

지역, 잔뿌리들이 교차하는 지점

대나무 숲을 본 적이 있는가. 무성한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그 숲이 어떤 줄기에서 시작되었는지 전혀 가늠할 수가 없다. 가늘고 굵은 뿌리들이 뒤엉켜서 어떤 줄기가 어떤 뿌리에 연결되는지조차도 알 수 없는 상태. 거기에서는 원뿌리와 잔뿌리를 나누는 것이 무의미하다. 뒤엉켜서 마구 뻗어나가다가 적절한 환경을 만나면 거기서 푸르고 곧은 대나무 줄기를 위로 올린다.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바로 대나무 숲이다. 계통적으로 분류하거나 위계화된 질서로 설명할 수 없는 저 상황, 우리는 이것을 리좀(rhizome)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강원도를 바라보는 지점이 바로 이곳이어야 한다.

오랫동안 행정이 만들어 온 위계적 질서에 길이 들어있어서, 어디에 사는가를 들으면 그의 공간적 위상이 단박에 파악되고 나아가 그 사람의 위치가 짐작이 된다. 대부분은 편견에 기인할 것임에 분명한 이러한 태도는 우리에게 깊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는 사회적 압박이었다. 춘천에 사는 사람은 더 시골에 사는 사람에 비해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고, 동시에 서울 사는 사람에 비해 좀 열등한 지위를 가지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어디서든 우리는 위계적으로 생각하고 느낀다. 이런 생각과 느낌들은 서울을 정점에 놓고 전국의 모든 행정 구역을 위계적 질서에 의해 배치했을 때 비로소 나타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서울로 수렴되는 논리 속에서 서울 이외의 지역이 할 수 있는 역할이 무엇일까. 서울을 근사하게 수식해주는 배경 외에 또 무엇이 있을까.

강원도라는 지역을 생각할 때 우리는 늘 그 상대편에 서울 문화로 대표되는 중앙의 거대한 문화 권력이 존재한다는 암묵적인 전제를 가지곤 한다. 문화의 특성이란 다른 것과의 비교를 통해서 선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비교에 우열 개념이 개재하지는 않는다. 누구나 다 아는 이야기지만 일상에서의 실천으로는 잘 구현되지 않는 것이기도 하다. 수많은 지역들의 삶이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는 순간 구체적 삶의 모습은 보편적이 되면서 개성과 지역성은 사라진다. 가을이 되면 나무마다 노란색, 붉은색, 갈색, 분홍색 등으로 자신만의 색깔을 드러내지만 그것을 ‘단풍’이라는 단어 하나로 수렴하는 순간 각각의 개성 넘치는 색깔은 사라지고 그저 하나의 개념만 남는다. 지역에 대한 생각도 이와 같다. 강원도만이 가지는 지역적 특성, 혹은 그 안에 소속되어 있는 더 작은 지역들이 드러내고 있는 현실 속에서의 구체성은 결코 하나의 지점으로 수렴되어서는 안 되며 그렇게 할 수도 없다.

모든 문화적 기준이 서울에 맞추어진 시대를 우리는 살아왔다. 새로운 문화의 형식을 만들어내고 그에 걸맞은 내용을 채우는 일이 서울 중심으로 이루어져 왔던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되기도 했지만, 그것은 일면 문화제국주의적 태도를 내면화해 온 측면도 분명히 있다. 서울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얼마나 많은 문화적 왜곡을 당연시해 왔던가. 서울을 중심으로 돌아가는 문화는 우리 시대 문화의 최고봉이라 칭송되면서 선망의 대상이 되는 동안 정작 다른 지역의 문화는 스러져가고 있었다. 그것은 표준어가 발명되면서 서울 이외 지역의 언어가 표준어를 따라가는 속도를 가속화했고 그 결과 자기 지역의 언어를 부끄럽게 생각하는 문화적 풍토를 만들었고, 나아가 지역의 언어 즉 방언의 소멸을 자초하게 된 것과 구조적 상동성을 지닌다. 결국 서울을 문화적 기준으로 삼게 되자 서울의 문화적 권력은 극에 달하게 되었고, 전국을 문화적으로 획일화하도록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서로 다른 문화가 만나서 충돌하거나 융합하면서 우리 시대를 반영하는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간다는 것을 너무도 잘 알면서 우리는 머리로만 그것을 이해했을 뿐 가슴으로 우러나오는 실천을 하지 못했던 것이다. 어쩌면 자신이 문화 권력의 위계에서 위쪽에 속한다는 착각 때문에 그 구조를 해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위계 속의 절대 권력에 겁을 집어먹고 투항을 한 것이리라.

서로 뒤엉켜서 어디가 원뿌리인지 가늠조차 할 수 없는 잔뿌리들의 엉킴과 뻗어나감을 통해 수많은 차이를 가진 줄기들이 여기저기서 불쑥불쑥 솟아나듯이, 문화라는 것은 다양한 지역의 서로 다른 문화들이 뒤엉켜서 혼재할 때 우리가 상상하던 혹은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새롭고 의미 있는 문화가 모습을 드러내는 법이다. 한곳에 머물러 자신의 것만 온전히 지키는 것을 최선으로 생각하는 지역 혹은 집단은 새로운 것을 만들어 낼 힘이 없다. 정체성조차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 그것 역시 구성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늘 내가 누리고 있는 지점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는 성향을 가지고 있다. 그 지점이 절대적 정체성이라고 주장하면서 변화하지 않으려는 순간 우리는 가지고 있던 것조차 조만간 잃어버리리라는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는 리좀적 사유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지역의 다양성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강원도 깊이 읽기의 새로운 지평

지난 세기 동안 우리는 위계적 질서 속에서 강원도를 구성해 왔다. 위계의 최상층에는 당연히 서울로 대표되는 절대적 문화 권력이 자리하고 있었다. 강원도의 문화는 그것이 어떤 분야든 간에 늘 서울의 문화와 비교되면서 낙후되거나 개혁되어야 할 대상으로 취급되었다. 학교 교육을 통해서 위계적 층위를 교육 받아온 세대가 자라서 사회의 중추가 되자 그 교육은 엄청난 힘을 발휘하였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절대적 문화 권력으로서의 서울 문화에 강원도 문화를 비교했고, 강원도를 깊이 사랑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약간의 부끄러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더욱이 다른 지역 사람들이 ‘강원도’라는 단어에서 순박함과 청정자연을 읽을 때에도 우리는 그것을 근대가 지향해야 마땅한 개발논리에 뒤처지는 것으로 생각하곤 했다. 이제는 이러한 논리와 시선으로 강원도를 보는 사람은 상당 부분 사라졌지만 우리 생활 속에서 문득 그 편린을 발견하는 것은 아마도 위계적 논의가 여전히 우리 사회에 넓은 그림자를 드리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위계적 질서는 늘 차이를 차등화시킨다. 가장 꼭대기에 누군가가 위치하는 순간 세계의 모든 사물들은 순서대로 배치되어 등수가 매겨진다. 그 속에서 각 단계의 지역들이 할 수 있는 건 오직 하나, 상층부를 향해 끈임 없이 나아갈 뿐이다(이런 지점은 영화 <설국열차(2013)>을 떠올리게 한다). 영화 <변산>의 학수가 여섯 차례나 도전해서 결국은 입상권에 들지만, 어쩌면 그들이 만든 리그의 규칙을 따르느라 자신의 특이성을 버린 것과 같은 논리다. 그들의 규칙에 따라 겨우 인정을 받았지만 학수는 오히려 자신의 현재를 만들어 준 수많은 것들을 버려야 했다. 그것이 어쩌면 ‘폐항’으로서 고향을 인식한 것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리라. 폐항 의식을 버리자(혹은 적극적으로 인정하자) 그의 음악은 달라졌고, 자신의 삶을 담은 새로운 음악에 접근할 수 있었다.

강원도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들을 버리면서 열심히 문화 기준으로 생각했던 이른 바 서울문화를 좇은 지 한 세기, 우리는 이미 많은 것들을 잊어버리거나 스스로 버렸다. 그것 역시 강원도의 현재를 만든 중요한 요소임에 분명하지만, 거대한 문화 권력에 눌려 가뭇없는 지층 저 아래편으로 사라졌던 흔적들을 새롭게 읽어내야 할 때가 도래했음을 암시한다. 고고학자처럼, 우리는 땅속 깊은 곳에서 강원도의 오랜 문화 지층과 그 속에서 빛나는 보석들을 발굴해야 한다. 다른 지역에서는 이 보석을 돌이라고 지칭할지라도, 우리는 그 돌이 어떻게 우리를 빛나게 해주었던 보석인지를 읽어서 드러내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지역은 다른 지역과 차이를 확보하는 것이고, 차이를 생성하는 힘이야말로 지역과 지역의 차이들이 만드는 새로운 조화의 세계를 구성하는 토대가 된다.

서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고 있다. 그렇지만 차이를 인정하는 것이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도록 실천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자신은 차이를 인정한다고 하면서 정작 위계적 질서로 공고한 사유체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일이 허다하다. 지역에 대한 사유는 늘 이 점을 기억하고 있어야 지금보다 좀 더 나은 곳을 발견할 수 있다. 강원도가 중요하다고 주장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늘 깔려 있어야 한다. 혹시 나는 서울 중심의 위계적 사유 체계 속에서 강원도를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하고, 다른 지역에 대한 깊은 공부와 함께 강원도와의 차이를 적극적으로 인정하고 배우는 태도를 갖추어야 한다.

나를 중심으로 사유하는 것은 어쩌면 인간의 숙명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 숙명의 드높은 장애를 넘어서 새로운 사유 지평을 열어젖히는 것 또한 이 땅을 살아가는 인간으로서의 도리가 아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