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있다 | 사람이 있다

나는 늘 칼 폴라니 가족의 식탁을 생각했다

‘사람의 도리’를 실천했던 진짜 귀족들

최성각 / 작가‧풀꽃평화연구소장, ’18.11月

글과 생태운동을 병행해온 생태주의 작가 최성각님은 우리 시대의 가장 급하고 절박한 일이 생명감수성의 회복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상이 이 지경에 된 데에 우리 모두 책임이 있다는 생각에서 '삼보일배' 운동을 창안하고, 우리나라 환경운동판에 속죄하는 환경운동 방식을 도입하기도 했다.
춘천 툇골 연구소에는 3만여 권의 장서가 있는데, 기증책만으로 이루어진 '기증책 도서관'을 건립하고 싶으나 혼자 할 수 없는 일이라 지니고 있던 책을 블로그를 통해 조금씩 내놓고 있다. 생태소설집 <쫓기는 새>, 생태에세이 <달려라 냇물아>,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등의 책을 펴냈다.

나는 처음에 이 꼭지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사람이 있다’라니?...이것은 어떤 사람에 대해 이야기하라는 기획인가, 아니면 어떤 이가 ‘나’를 이야기하려는 지면일까? 그것도 아니면 내가 나에 대해 말하라는 곳일까? 툇골에 온 편집자를 만났더니 다행히 인터뷰는 아니었다. 내가 누군가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가능한 일이지만, 어느 날 느닷없이 뜬금없이 무슨 고해성사의 장소도 아니건만, 내가 나 자신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낯설고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고심하다가 원고청탁서를 다시금 정독하자 어쩌면 내가 할 이야기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원고청탁서는 다음과 같았다.

'나고 자람'을 성장이라고 합니다. 어디까지 자라야 성장의 끝이 있는 걸까요? 우리 사회는 지금까지 지속 성장, 양적 성장이라는 미명 아래 사람 자체는 보지 못했던 것 같습니다. ‘달려라 냇물아’에서 보여지듯 작가님이 주목했던 삶의 방식처럼 생명에 대한 이야기와 지역이라는 공동체 안에서 다른 존재와 공존하며 성장하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요청 드립니다.

누구라도 느낄 수 있겠지만, 원고청탁서 안에는 다소 모호하지만, 편집자의 문제의식과 진지한 고민이 담겨져 있었다. 그 진지함 때문에 이내 한 사람이 떠올랐다.
그의 이름은 칼 폴라니(Karl Paul Polanyi).
칼 폴라니라는 사람을 처음 만난 것은 1979년이나 1980년 즈음이었다. 물론 직접 만난 것은 아니다. 책을 통해 만났다. 피터 드러커(Peter F. Drucker)가 쓴 <방관자의 시대>(갑인출판사, 1979년)라는 책이 그것이었다. 칼 폴라니가 누구인지 아는 사람은 그의 역저 <거대한 전환>을 접한 소수이겠지만, 피터 드러커는 우리나라에서도 널리 알려진 오스트리아 빈 출신의 미국의 유명한 철학자다. 그가 쓴 책, 그에 대한 책도 많이 있다. 주로 그는 경영쪽의 글을 많이 쓴 이라서 주로 매일경제신문이나 한국경제신문 같은 경제지 출판부에서 그의 책을 펴내곤 했다. 기업에서 일하는 사람들, 경제정책을 입안하고 모색하는 사람들에게 피터 드러커의 저작은 거의 필독서이고 스테디셀러들로 알고 있다. 그러나 경영전문가로 알려진 한국과 달리 정작 미국에서 그의 위치는 ‘제1급의 철학자’로 통한다.
<방관자의 시대>라는 제목은 당시 20대 중반이었던 나에게 약간 꺼림칙하고 재수없는 제목이었다. 그렇잖아도 먼 곳 남쪽에서는 대학살이 일어났는데, 멀쩡히 살아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부끄럽고 죄스러운데 ‘방관자’라니? 미국의 Harper & Row 출판사에서 1979년에 출간한 책의 원제는 <Adventures of a Bystander>. ‘구경꾼의 모험’, 혹은 ‘주변인의 모험’...과 같은 조금 에두른 번역도 가능하겠으나 그래도 한국어판 번역자는 ‘Bystander’라는 단어의 1차적 원의(原意)인 ‘방관자’라는 단어를 취했고, 그것에 독자가 이의를 달 재간도 없었다.
드러커가 자신을 ‘방관자’라고 명명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오스트리아 빈 태생인 드러커의 나이 14살 때, 마침 11월 11일이 ‘리퍼블릭 데이‘였다. 리퍼블릭 데이란 합스부르크가의 마지막 황제가 퇴위하고 공화제가 선포된 기념일이었다. 기득권자에게는 상복까지 입지는 않았으나 악몽과 같은 전쟁에 패배가 결정되고 수세기에 걸친 역사가 와해된 슬픈 날이었으나 당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빈의 사회주의자들에게 이날은 승리의 날이자 축제의 날이었다. 열차운행은 중지되고 시 전체가 붉은 깃발을 들고 혁명가를 부르면서 시청앞 광장으로 모여드는 ’자발적 데모‘의 날이었다. 소련에서 시작한 ’메이 데이‘보다 앞선 빈의 사회주의자들이 벌인 이 축제는 훗날 무솔리니, 스탈린, 히틀러는 물론이고 모택동이나 페론까지 모방한다.
어린 드러커는 청년단의 일원으로 이 명예로운 데모에 참여한다. 드러커는 학교에서 외톨이였고 왕따였기에 깃발을 들고 선봉에 서서 행진하는 일이 더욱 흥분되었고, 그 용기있는 행동으로 학우들간에 인기를 얻고 싶은 욕망에 불탔다. 그런데 깃발을 들고 흥분한 군중의 맨 앞줄에서 행진하던 소년 드러커는 전날 밤에 온 비로 생긴 물웅덩이 앞을 지나가게 되었다. 그는 웅덩이를 좋아햇고, 물웅덩이를 지날 때의 그 철벅철벅거리는 소리만큼 신나는 소리도 없다고 생각하던 소년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는 그럴 기분이 아니었다. 드러커가 회고한다.
“이것은 내가 택한 웅덩이가 아니다. 데모데에 밀려서 밟게 된 웅덩이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진로를 바꾸려 하였다. 그러나 나를 따르는 사람들의 저벅저벅하는 리드미컬한 발소리, 많은 사람들의 웅성거림, 대행진의 물리적 강제력이 나를 압도했다. 나는 웅덩이의 한가운데를 밟아서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여기서 내 뒤에 서 있는 그 다부진 여자 의과대학생 손에서 아무 소리없이 깃발을 빼앗아 들고 대열에서 벗어나 집으로 돌아갔던 것이다.”
이 회고의 앞부분에서 소년은 이미 깃발을 들고 혁명가를 부르고 있었는데, 웅덩이를 지나간 뒤 다시 여자 의과대학생의 깃발을 빼앗아 들었다는 대목은 이상스러운 대목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거를 회고하는 드러커의 중복발언일 뿐, 중요한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일 중요할까. 드러커는 두세 시간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가면서 깊은 고독감을 느낀다. 다시 대열에 끼고 싶어하는 마음마저 일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간 뒤, 저녁에야 돌아오리라 여겼던 부모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어디 기분 나쁜 일이라도 있었니?”라고 물었을 때, 드러커는 “천만에요, 아주 좋아요”라고 답했다. “다만, 저는 다른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어요”라고 덧붙인다.
바로 이 대목이다. 드러커는 바로 그날, 물웅덩이를 자기의지로 밟고 노는 것은 싫어하지 않지만 남에게 떠밀려 물웅덩이를 밟게 되는 상황을 견딜 수 없어 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아챈 것이다. 즉 자신의 위치는 ‘Bystander’, ‘방관자’라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때 경험 이후 드러커는 평생을 자신의 의지로 살아가려는 사람, 즉 타력에 떠밀려 살지 않으려는 사람, 어떤 무리에도 속하려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일컫는 말로서 ‘Bystande’보다 더 적절한 표현은 없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그 말이 환기하는 무임승차자, 비겁자, 약아빠진 기회주의자의 이미지와는 전혀 다른 의미에서 자기 정체성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였다. 그래서 이 책의 제목이 바로 <방관자의 모험>이 되었던 것이다. 내가 접했던 갑인출판사의 그것은 <방관자의 시대>, 드러커의 일생 동안 만났던 ‘기록할 가치가 있는, 여러 번 생각할 가치가 있는 사람과의 사건을, 그리고 자신의 단편적인 세계상’을 다룬 책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드러커는 분명하게 책의 서두에서 “이것은 자서전이 아니다”라고 밝혔건만 우리나라 모 경제지에서는 이 책을 후일 <드러커 자서전>이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하지만, 이것 역시 그리 중요한 이야기는 아니다.
내가 소개하려고 하는 중요한 이야기는 바로 이 책에 실려 있는 폴라니가문에 대한 이야기다.

드러커가 폴라니 가문의 한 사람이었던 칼 폴라니를 처음 만났던 때는 1927년. 그때 드러커는 학교를 졸업하고 함부르크의 어느 수출회사의 수습서기로 일하고 있었다. 입사한 지 4개월 만에 그는 직장인으로서 처음으로 첫 크리스마스 휴가를 얻어 비인으로 갔다. 그때 비인에서 드러커를 기다리고 있던 초청장이 하나 있었다. <오스트리아 에코노미스트> 신년 특집호의 편집회의에 나와달라는 초청장이었다. 당시 <오스트리아 에코노미스트>는 유럽에서 손 꼽히는 잡지였다. 그 잡지의 편집회의에 젊은 드러커가 초대받은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었다. 초청장 끝에는 “귀하의 파나마 운하에 관한 논문을 읽었는데 아주 훌륭한 논문이라 생각합니다”라는 연필글씨가 씌어 있었고 편집장의 사인이 담겨 있었다. 그 논문은 드러커가 대학입시를 위해 썼던 논문이었는데, 몇 주일 전에 독일 경제 계간지에 실렸었다. 그것이 드러커의 글이 생애 처음 활자화된 것이었는데, 그 글로 그토록 영광스러운 초대를 받게 될지는 몰랐다. 이 대목에서 잠깐 생각해보자. 대학입시를 위한 논문이 독일의 경제 계간지에 실리고, 그것을 본 유럽 최고의 경제지에서 편집회의에 그 논문을 쓴 청년을 초청한다? 이 일이 바로 90년 전에 유럽에서 일어났던 일이다. 우리에게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학생의 논문이 경제전문지에서 실릴 수 있을까.

편집회의는 크리스마스 당일 아침 8시부터 시작되었는데, 예정시간보다 40분이나 늦게서야 시작되었다. 흰 수염이 나고 귀가 아주 어두운 신사이며 이 잡지의 창간인이기도 한 노인도 정시에 나타났고, 다른 편집위원들도 모두 정시에 나타났으나 편집회의가 지연된 것은 모두들 편집차장인 칼 폴라니가 40분 후에야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칼 폴라니는 늘 편집회의에 늦게 나타나곤 했는지 사과도 없이 자리에 앉자마자 트렁크에서 책, 신문, 잡지 따위를 거칠게 테이블 위에 꺼내더니 우렁찬 음성으로 톱 스피드를 내며 지껄이기 시작했다. 그것을 드러커는 “순간 그의 입에서 마치 산허리를 굴러내리는 화산암과 같은 놀라운 기세로 말이 튀어 나왔다‘고 회상하고 있다. “내가 생각하고 있는 신년호의 권두 논문은 네 편이오. 첫째는 중국정세에 관한 논문, 장작림과 장개석이나 각지의 군벌, 예컨대…”, 하면서 “레닌주의는 이미 죽었고 공산주의 혁명도 죽었소. 오늘날 소련정치는 새로운 형태의 동양적 전제정치요, 농노제까지 부활되었소. 마지막은 케인즈라는 영국 경제학자에 대한 논문…, 케인즈는 재래의 경제학이 깜짝 놀랄 흥미진진한 새 이론을 요즘 계속 발표하고 있죠”...라는 달변으로 이어졌다.

편집회의는 칼 폴라니의 위압적인 독주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후 한구석에 어떤 새파란 젊은이가 앉아 있는 것을 본 폴라니는 청년에게 “우리 권두 논문 테마에 대한 무슨 의견이라도 있소?”하고 물었다. 마침 드러커는 편집위원들이 논쟁하고 있는 동안 혹시 무슨 말을 보탤 수 있을까 자문하고 있었기에 즉석에서 “히틀러가 독일을 지배할 위험성에 대한 논문은 어ᄄᅠᆯ까요?”라고 답했다. 모든 편집위원들이 “나치는 지난 선건에서 참패했소. 이미 죽은 거나 다름없소.”라고 묵살했다. 드러커는 굽히지 않고 “네 하지만 저는 역시 나치가 두렵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그 편집회의에서 세찬 카리스마를 내뿜던 독재자 칼 폴라니가 “으음 아주 중요한 테마로군. 젊은이는 왜 나치가 두려운지 그 이유를 정리할 수 있겠소? 더블 스페이스로 타이프 용지 두 장 정도로.”

이와같은 대화로 인해 폴라니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드러커는 용기백배해서 회의가 끝난 뒤 “아까 그 테마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도 들을 겸 당신 집까지 가고 싶은데 괜찮겠습니까?”, 하고 칼 폴라니에게 물었고, 풀라니 또한 즉석에서 승낙하고 그 집의 ‘크리스마스 디너’에 초청해 주었다.

신문사에서 나올 때 마침 업무 매니저가 그 달치 급여가 나왔다고 말했고, 폴라니는 마침 트렁크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순간 그 수표를 좀 받으라고 부탁하면서 매니저가 가져온 영수증에 사인을 했다. 그랬기 때문에 드러커는 수표에 적힌 액수를 볼 수 있었다. 1927년 오스트리아 수준에서 폴라니가 받은 급여액은 엄청나게 큰 금액이었다.

폴라니와 드러커는 시내전차로 종점까지 갔다. 그곳은 도심에서 상당히 벗어난 빈민가였다. 그곳에서 그들은 다른 노선으로 바꿔타고 작은 공장이나 창고가 들어선 공장지대를 빠져나갔다. 이번에도 종점에서 내려 20분 이상이나 걸어서 폐차장과 쓰레기 처리장을 지나 겨우 5층 건물인 낡은 아파트에 도착했다. 1,2층은 판자로 막혀 있었고, 인적이 없었다. 그들은 5층까지 올라갔다. 5층에 있는 그의 집은 코를 잡아도 모를 정도로 어두웠다고 한다.

앞서 소개한 다소 지루한 이야기들은 모두 드러커가 도심에서 멀리 벗어난 빈민촌에 있던 폴라니 집에서 목도한 일들을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한 긴 서두였다.
청년 드러커와 폴라니를 맞이한 사람은 그의 아내 이로나와 그녀의 모친, 그리고 여덟 살 정도의 외딸이었다. 이로나의 모친은 헝가리 남작의 아내였다. 그들은 곧 저녁식탁에 앉았다. 그 식탁은 당시 드러커가 생애에서 만난 최저로 엉망진창인 식탁이었다.
이 대목은 본문을 인용하는 게 더 낫겠다.
“아무렇게나 껍질을 벗겨 으깬 감자-마가린조차 곁들이지 앟았다. 이게 크리스마스 디너라니! 모두가 내(드러커)게 무관심했다. 식사에도 집착하지 않았다. 아이를 포함한 가족 4인은 어떻게 하면 칼이 다음 달 생활비만큼 벌 수 있는가 침을 튀기며 논하고 있었다. 지불에 필요한 금액은 아주 얼마 안 되는 금액이었다. 폴라니가 조금 전에 받은 금액의 1만분의 1도 안 되었고, 함부르크의 수습서기 봉급으로 생활하고 있던 내가 아무리 절약해도 살아갈 수 없을 정도의 적은 금액이었다. 나는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끼어들어서 미안합니다만, 실은 조금 전에 폴라니 박사의 수표를 보았습니다. 그 정도라면 더할나위 없이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 순간 네 사람은 갑자기 입을 다물고 침묵했다. 그것이 무한한 침묵의 순간처럼 생각되었다. 이어서 네 사람은 나에게 시선을 돌려 내 얼굴로 노려보았다. 그리고 거의 이구동성으로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거에요. 월급으로 받은 수표를 자기를 위해 쓰다니! 처음 듣는 이야기에요.” “하지만...”, 나는 우물거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대부분의 사람과 다릅니다.” 칼의 아내 이로나는 엄숙한 말투로 이야기했다. “우리 일가는 도리를 존중하고 있어요. 빈은 지금 헝가리에서 온 피난민으로 가득합니다. 공산주의와 그후의 백색 테러로부터의 피난민이지요. 생활비조차 제대로 벌지 못하는 사람이 숱합니다. 하지만 칼이 버는 능력은 종잇장 같지요. 칼이 월급으로 받는 수표를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고 우리 가족이 필요로 하는 것을 별도로 버는 것은 도리를 존중하는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피터 드러커, <방관자의 시대>, 갑인출판사, 1979년, 146~147쪽.)

내 나이 20대 중반, 사람을 아연하게 만드는 이 충격적인 구절을 만난 뒤, 나는 깊은 감동에 젖었다. 그후로도 살아오면서 숱한 사람들을 만나고 수많은 책 속의 인물들을 만났지만, 그들 중에는 의인도 있었고, 협객도 있었고, 자기헌신이 사명인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도 그때 폴라니의 아내가 했던 말, 즉 폴라니 가족이 취했던 같은 시대의 이웃에 대한 믿어지지 않는 태도는 왜 그리도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았을까. 드러커처럼 그 식탁에 앉아 직접 그 이야기를 들었던 사람도 아니건만, 이 대목의 강렬함은 유별났는데, 그 이유는 나도 아직 잘 모르겠다. 조금 과장해서 말하자면, 한 권의 책을 통해 알게 된 90년쯤 전의 오스트리아의 빈 외곽의 어떤 낡은 아파트 5층에서 펼쳐졌던 그 검소한 식탁과 그때 폴라니 가족이 나눴던 이야기들을 나는 언제나 잊지 않고 살아온 것 같기도 하다.
2010년 나는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동녘)라는 제목의 생태서평집을 펴냈는데, 그곳에서도 나는 ‘실현불가능한 대의(大義)에 헌신했던 위대한 괴짜들’이라는 제목으로 드러커가 만난 폴라니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폴라니 가문에 대한 요약은 그 책에 의존하는 게 좋을 듯하다.

이 책(드러커의 <방관자의 시대>)에는 프로이트, 토마스 만, 키신저와 같은 역사적 인물들이 대거 등장한다. 그러나 드러커는 폴라니 일가를 자신이 알고 있는 한 가장 재능이 풍부한 사람들이었고 가장 큰 업적으로 올린 사람들이지만 그처럼 큰 실패를 겪은 사람들도 없다고 회고한다. 빅토리아 왕조시대의 부친으로부터 비롯해 1960년대까지 폴라니 가문이 걸어간 길은 가히 경이적이었다. 부친은 헝가리의 철도왕이었다. 스무 살 연하의 그의 아내 세실리아는 러시아 백작의 딸로서 아나키스트였다. 그녀는 10대 중반에 화학실험실에서 폭탄을 만들어 경찰 간부를 살해한 무정부주의 테러단의 핵심 멤버였다. 10대 후반에 이미 전설이 된 세실리아는 다섯 아이를 낳았는데, 그들 부부는 자식들을 고성(古城)에 집어넣어 세속의 위선과 부패에서 완전 격리시킨 뒤 형제들끼리도 서로 만나지 못하게 유폐시킨 뒤, 가정교사에 의해 ‘각기 다른 개성을 가진 독특한 인간’으로 육성한다.
후에 장남은 피아트 회사를 만들고 사회주의 성향의 언론사 사장가지 역임하는 사업가가 된다. 뿐만 아니라 무솔리니의 친구 겸 스승으로서 무솔리니의 뇌를 담당하고, 그가 독재자가 되기 전까지 돕는다. 사회주의도 공산주의도 아닌 공동체 국가를 기반으로 하는 계급 통합과 같은 새로운 비전으로 무솔리니를 전향시키려 했다. 그러나 친구이지 스승을 배신한 야심가 무솔리니는 파시스트가 되고, 장남은 가족들로부터 파문을 당한다.
둘째는 건축기사로서 현대 브라질 회화, 브라질 건축의 기초를 닦았다. 그는 브라질이 유럽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신념으로 수도를 내륙에 건설하기 위해 고군분투한다.
편집장 칼 폴라니의 여동생 모우지는 25세 이전에 공적 활동을 다 마쳤는데, ‘농촌사회학’이라 불리던 그녀의 헝거리 민족운동은 후일 이스라엘의 키브츠 탄생의 기초가 되었다. 유명한 경제학자였으며 시오니스트 프란츠 오펜하이머는 그녀의 제자였다.
막내인 미하엘은 과학자로서 아인슈타인의 조수였는데, 1920년에 이미 노벨상 후보에 올라 있었으나 2차대전 이후에는 타락흔 브르주아 자본주의와 개인을 부정하는 마르크스 사회주의를 모두 배격하는 중도를 걷는 철학자가 되었다.
폴라니 가의 부모는 추구한 일은 각기 달랐으나 한 가지 목표, 즉 대의를 위해 헌신하는 이상주의자들로서 자식들을 키웠던 것이다.(최성각, <나는 오늘도 책을 읽었다>, 동녘, 167~69쪽)

20세기초 폴라니 가 형제들의 이력은 다시 살펴봐도 경이롭다. 그들이 말했던 ‘인간의 도리’나 대의는 현실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는 불가능한 꿈이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사라져 버린 위대한 인간들을 바라보는 드러커의 시선은 존경에 차 있으나 냉정하기 그지없다. 고액의 임금을 자신의 가족만을 위해 사용하는 일은 비난받을 일도, 비난할 일도 아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우리 보통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알고 있고 그렇게 돈을 사용하고, 더 넉넉한 재화를 지니며 살기를 바라면서 살고 있다. 그런데. 이들은, 이토록 걸출한 교육을 받은 특별히 뛰어난 이들은 그 걸출함에 맞는 특권을 누리기는커녕, 그들이 생각하는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면서 살았던 것이다. ‘유럽의 철도왕’으로 상징되는 어마어마한 부, 친척들의 작위로도 느낄 수 있는 높은 신분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자신을 위해서만 살지 않았다. 이들이야말로 바른 의미의 엘리트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나라에서 스스로 엘리트라고 여기는 자들의 가짜 귀족주의와 끝모를 탐욕과 기득권 수호를 위한 특권적 노력은 이들 폴라니 가문의 형제들에 비할 때 얼마나 유치하고 왜소한가.
하지만, 이 세상에는 여전히 ‘최고의 행복은 개인적인 행복을 추구하지 않는 데서 비롯된다고 믿는 도덕주의자들’(오르한 파묵의 소설 <눈>에 나오는 구절)이 있다. 그러한 도덕주의자들은 타인에게 도덕을 강요하지 않는다. 다만 자신만을 위해 사는 일에 부끄러움을 느끼고, 그런 태도가 자신을 추하고 남루하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여기 사람이 있다’라는 주제를 받고, 나는 칼 폴라니 가문의 이야기를 했다. 분명, 이들의 이야기는 우리 현실에서 너무나 동떨어진 낯선 이야기일 수도 있다. 남들만큼 공부했건만 당장 취직을 못해 안달인데, 대의를 이야기하고 이타적 삶을 강조하다니, 이 무슨 미친소리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이런 종류의 특별한 인간들, 혹은 참다운 엘리트들이 생각하고 실천하던 ‘사람의 도리’를 생각하면서 우리가 누구인지, 우리는 무엇을 추구하고 있고, 나는 어떤 유형의 사람인지 한번쯤 생각해 볼 기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