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생각과 마음을 잇다 | 생각을 잇다

야성이 꿈틀거리는 강원 예술

탁동철 / 양양상평초등학교 교사, ’18.11月

지나치면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이 술이나 약물만은 아니다. 가르침 또한 인간을 형편없이 망치게 하는 위험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침이 무기력의 원인이라면, 그와 반대로 하는 것은 어떨까. 아무것도 안 가르치는 것.

서울에서 강원도 산골로 산촌 유학 온 아이들이 있었다. 낯설고 놀라운 아이들이었다. 자연이 아닌 사람을 놀잇감으로 여기는 듯 남의 이름을 갖고 놀리고, 남의 머리나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건드렸다. 누가 누구를 좋아한대요, 이 따위 시시껄렁한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 말 건네는 어른과 눈을 못 맞추었고, 중얼중얼 “몰라요, 못해요.”를 입에 달고 지냈다. 조그마한 자존감도 없어서 어떤 순간에도 화를 내며 덤벼들었다. 싸움이 생기면 손에 돌멩이를 들거나 주머니 속에서 커터칼을 꺼내들기도 했다. 인간이 저렇게도 꼴사나울 수 있는지, 무능할 수 있는지, 무기력할 수 있는지. 도시 아이들이란 저 모양인가 절망스럽고, 한편으로는 의심이 갔다. 뭔가 특별한 사정이 있는 아이들일 것 같았다.
아이들의 부모는 영화감독이나 변호사 뮤지컬 배우 같은 바쁜 직업을 가진 분들이라 했다. 돈 잘 벌고 교육에도 관심이 많았다. 부모들은 지극정성으로 아이들을 가르쳤다 한다. 학원에서 학원으로. 이런 선생에서 저런 선생한테로. 음악 학원, 미술 학원, 검도, 명상, 철학…. 아이들 성장에 도움 되는 종목이 얼마나 많겠나. 세상에서 좋다는 것들 애써서 가르쳤겠지만 아이들은 좋아지지 않았다. 배우고 또 배우고 가르치고 또 가르치고. 가르치면 가르칠수록 아이들은 무기력해졌다.
지나치면 몸을 망치게 되는 것이 술이나 약물만은 아니다. 가르침 또한 인간을 형편없이 망치게 하는 위험물이 될 수 있는 것이다. 가르침이 무기력의 원인이라면, 그와 반대로 하는 것은 어떨까. 아무것도 안 가르치는 것.
도시 아이들은 아무것도 안 가르치고 안 배워도 되는 강원도 산골로 유학을 왔다. 텔레비전 없고 핸드폰 컴퓨터 못 하고 학원 안 가고. 아이들은 어른의 가르침 없는 곳에서 저들끼리 마냥 논두렁을 뛰고 냇가에 가서 물고기를 잡고 자전거로 마을길을 돌아다녔다. 배우지 않고 놀기만 했다. 성적과 상관없는 짓으로 시간을 보냈다. 아무것도 안 배운지 두 달이 지나자 눈빛이 달라졌다. 아이들한테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6개월이 되니까 어른 말을 들어주기도 했다. 말 건네는 사람과 눈을 마주쳤고 다툼이 적어졌다. 잔인하게 싸우지 않았다.
가르치고 돌볼 때는 절인 배추처럼 시들고 늘어졌던 아이들이 안 가르치고 안 배우니까 다시 생생 살아난 것이다. 인간은 안 배우고 안 가르쳐야 사람답게 되는구나 싶었다.
아무것도 안 가르치고 안 배우고 저들 하고 싶은 대로 마냥 놀기만 하며 자연 속에서 자기 스스로를 키워내는 아이들이었다. 하지만 더 들여다보면 그 곳에는 가르치는 손을 숨긴 어른이 있었다. 아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해냈다 여기도록 멀리서 지켜준 선생이 있었다. 노래하고 싶을 때 아무렇게나 노래를 하도록 부추긴 노래 선생, 아이들이 마을 길 걸을 때 말 건네준 마을 노인, 말 같지 않은 말을 들으며 가끔 고개를 끄덕여준 선생, 톱질 망치질을 같이 한 선생이 있었다. 아이들은 어떤 어른한테도 배우지 않고 맘껏 놀기만 했다지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교육 속에 있었던 것이다.
한 아이로부터 출발하는 교육. 한 아이의 뜻에 호응해서 아이가 자기 길을 가도록 보아주는 교육. 가르치는 어른의 손을 숨기고, 아이가 어른의 도움 없이 스스로 해냈다는 느낌을 가지도록 하는 교육. 못 해도 돼, 틀려도 괜찮아, 니 하고 싶은 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게 길이야, 하며 등 두드려 주었던 교육. 시든 영혼을 생생하게 살려내는 교육. 이런 것에는 어떤 이름을 붙일까. 이런 것에 ‘예술’이라는 이름이 붙어야 하는 것 아닐까.

해가 떠도 누군가는 우울하고 누군가는 기쁜 것처럼, 아이들의 감정 또는 느낌에는 틀린 게 없다. 누가 피카소 그림을 틀렸다 하겠나. 이해를 못할 뿐이지. 노래 음이 안 맞는 아이가 있으면 틀린 게 아니라 화음이다, 글자가 삐뜰빼뚤 틀리면 ‘작품이다.’ 라고 기뻐해주면 그만이다. 틀린 게 없다, 틀리면 뜻밖에 더 예쁘다, 틀려도 괜찮아’가 아니라 틀려야 아름답고, 틀려야 달라지고, 달라야 아름답다, 이런 식으로 아이의 세계를 한없이 긍정하고 인정하고 그 영혼이 맘껏 자유롭게 피어나도록 하는 교육이라면 ‘예술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일만하다.
지금의 어른들이 아이였던 시절에는 어른의 눈길이 미치지 않는 시간이 있었다. ‘방과후’라는 말이 없었다. 학교 마치면 가방 휙 내던지고 산으로 들로 자기들끼리 어울렸다. 소먹이고 나무하고 소나무 검불을 긁으러 갔다. 뱀을 잡고 물고기를 잡고 나무 타기를 했다. 맘껏 쓸데없는 짓을 할 수 있었다. 어른의 보호 속에서 무기력하게 구겨진 채 자신을 내팽개칠 틈이 없었다. 세상에 자기 일이 있고 자기만의 몫이 있었다.
요즘 아이들은 어떤가. 24시간 어른의 통제와 보호와 가르침 속에서 지낸다. 아침에 학교에 가면 아홉 시부터 시작해서 그 뒤로 다섯, 여섯 시간 내내 어른의 가르침이 이어진다. 자신이 무엇을 배워야 하는지 어디까지 배워야 하는지 어떤 활동을 해야 하는지는 오직 어른의 생각에 의해 결정된다. 어른의 생각을 잘 따르면 착한 학생이고, 그렇지 않으면 문제 학생이다. 오후 세 시가 되면 비로소 어른의 가르침에서 벗어날 기회가 온다.
예전 같았으면 오후 세 시, 이때부터는 아이들만의 시간이다. 저들끼리 어울리며 산으로 들로 맘껏 피어날 수 있었던 시간이다. 요즘은 아니다. 교과 수업이 끝난 오후 세 시가 되면 ‘방과후’가 기다린다. 아이들은 ‘방과후 예술 수업’ 이라는 이름으로 또 다시 어른의 가르침을 들어야 한다. 방과후 서예, 음악, 오케스트라, 수영, 컴퓨터, 미술 ….
아이들은 지쳐있다. 더 힘을 내볼 수 없다. 무엇을 더 배우고 싶겠는가. 아무리 실력 있는 방과후 강사가 오더라도 어찌 해볼 수 없는 노릇이다. ‘교육’이라는 이름이 붙은 활동, 어른이 끌고 가는 활동이라면 아이들에게는 무기력하게 주저앉고 싶은 시간일 뿐이다. 오케스트라 교육? 음악 교육? 서예 교육? 검도? 산골 마을로 산촌유학 오기 전 도시 아이들이 겪었던 것, 배우고 또 배우며 몸과 마음을 시들게 했던 ‘가르침’이라는 위험물질이 바로 이것들이었다.
강원도는 달라야 한다. 얼마든지 다르게 할 수 있다. 강원도에는 자연이 있다. 자연 속에 사는 아이들은 감각이 살아있다. 귀가 예민하다. 기계 소리, 차 소리, 인공의 소리에 길들여진 도시 아이들의 귀와는 다르다. 강원 아이들은 개 짖는 소리, 새소리, 귀뚜라미 소리, 바람이 가랑잎 몰고 다니는 소리에 익숙하다. 소리도 구체적으로 듣는다. 개구리 소리를 들으면 그냥 개구리가 아니라 산개구리가 우는지 참개구리가 우는지 가려낸다. 새가 울면 그냥 새가 아니라 꾀꼬리인지 까마귀인지 구별할 줄 아는 귀가 있다.
자연 속에서 사는 강원도 아이들은 원래의 색을 본다. 만들어낸 색을 보고 크는 도시 아이들과 다르다. 하늘색은 회색이 아니라 진짜 하늘색을, 풀색은 진짜 풀색을, 빨간 꽃 색을 본다. 자기도 모르게 색깔 감각이 몸에 배어있다. 자연의 색깔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고 큰다.
강원도에는 나무가 있고 바위가 있고 산과 들, 그리고 맘껏 거닐고 뛸 공간이 있다. 도시에는 없다. 도시에는 자연의 소리가 없고, 자연의 색깔이 없고, 자연의 감각이 없고, 맘껏 누릴 공간이 없다.
도시에는 없고 우리 강원도에는 있는 것. 여기에서 출발해야 한다. 인공의 것으로 가득한 도시의 교육 방식을 따라가는 것은 쓸개 빠진 짓이다. 강원도의 교육, 강원도의 예술 교육이 어른의 틀에 맞추어 아이를 키워내는 인공의 도시 교육과 같아야할 까닭이 전혀 없다. 강원 교육은 풀 냄새 바람 소리가 있는 자연 속에서 아이들의 몸과 마음이 맘껏 피어나도록 하는 교육, 야생이 꿈틀거리는 교육이 되어야 한다.
강원의 자연을 예술의 재료로 끌어들이는 건 어떨까. 도시 아이들이 배운다는 카온이라는 악기 따위, 없어도 된다. 카온 대신 나무를 두드리고, 벽을 두드리고 돌멩이를 두드리고 자기 배를 두드리면 된다. 도시의 음악 공연장 따위, 없어도 된다. 산과 들에서 새소리 개소리 물소리 바람소리 돌멩이 땀 흘리는 소리 찾아다니고, 리듬과 멜로디 붙이고 노래하고 춤추며 서로가 서로에게 공연을 보여주면 그만이다.
아이들이 갖고 있는 모든 걸 자기들 방식으로 풀어내도 된다는 것을 아는 순간 아이들은 뭐든지 해낸다. 그냥 아무렇지 않게 한다. 그게 무엇이든. 온 나라 누구든지 잘 하는 것을 잘해야 할 필요가 어디 있나. 잘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자기만의 감각을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 감각 익히는 훈련을 예술적인 방법으로 다가가는 선생이 있어야겠지. 음악, 악기, 오케스트라 따위 기능을 가르치는 기술 선생이 아니라 자유로운 영혼을 부추기며 아이가 그것을 하고 싶게 만들어 주는 예술 선생.

강원도 아이들의 삶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그대로를 예술로 끌어들이는 건 어떨까. 올해 학교 뒷산에서 야생개가 내려왔다. 아이들 사이에 온갖 말들이 돌았다. 이빨이 날카롭다, 사람한테 덤볐다, 밤중에 뒤를 따라 왔다, 떼로 몰려다닌다 하며. 파출소 순찰차가 경광등 번쩍거리며 와도 소용없었고 소방대원들이 출동했지만 붙잡지 못 했다. 장승리에 사는 4학년 용민이가 공책에 쓴 시.

산개

산개가 타닥타닥 / 학교를 내려다본다. / 우우웅 활활
나도 산을 보며 개처럼 짖는다 / 우우웅 활활
개 / 무서운 개 / 치타 같이 뛰는 개
잡아야 된다 잡아야 된다 / 영차 영차

아이들이 나섰다. 개가 내려오는 산 밑에 구덩이를 팠다. 파고 또 파고, 비 오는 날은 2인 1조로 앞에서 삽질하고 뒤에서 우산 씌워주며 팠다. 한 달 가까이 파낸 구덩이에 드럼통을 묻고 드럼통 바닥에 고기 그물 깔고 솔잎으로 함정 위를 덮고 먹이를 놓아두었다. 고양이가 두 번 빠졌다. 개는 안 빠졌다. 작전을 바꿔서 드럼통 함정을 파내고 입구가 넓은 고무통 함정을 묻었다. 후라이팬에 삼겹살을 구워 산 쪽으로 부채질하며 개를 유인했다. 소용없었다. 개가 얼마나 발밑을 조심하는 동물인지 알 것 같았다.
산개는 변함없이 타닥타닥 돌아다니는데 오히려 개 잡겠다는 아이들 마음이 변했다. 두려움이 애정으로. 자기들에게 잡히기 전에 개가 굶어죽으면 어쩌나, 감기 걸리면 어쩌나 걱정하는 마음이 생기더니 어느새 떠돌이 산개와 흠뻑 정이 들고 말았다. 나중에는 ‘꼭 구출해주세요.’ ‘TV 동물 농장 광팬이에요.’ 이러며 방송국에 편지를 보냈고, 방송국 개 전문가들과 함께 방학 내내 쫓아다녀서 한 달 만에 붙잡기는 했다. 지금은 아침마다 개 산책을 시키고 있다. 학급에 개 당번이 있어서 먹이 주고 똥 치우고, 아주 일이 많다. 일이 많지만 아이들은 기쁘게 그 일을 해낸다. 한 가지 더. 구덩이가 남았다. 개 붙잡는다고 웃통 벗고 파낸 구덩인데 쓸모가 사라졌다. 원래대로 메워놓아야 하는데, 힘들게 판 걸 그냥 메우려니 허무하고. 떡 본 김에 제사도 지낸다니까 구덩이 판 김에 뭐라도 하자 싶었고, 그 자리에 감나무와 모과나무를 심었다.
여기까지는 아이들의 경험일 뿐, 예술이라 할 게 없다. 이런 경험을 예술로 바꾸기 위해서는 전문가가 있어야겠지. 아이들의 경험을 연극이나 악기 연주, 노래나 뮤지컬로 만들어낼 수 있는 예술 선생. 어른의 생각으로 무작정 끌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한 아이의 한 아이의 경험에서부터 출발하는 예술 전문 강사면 좋겠다. 아이들이 산개를 붙잡는 것이 놀이가 되었던 것처럼 아이들의 경험을 예술로 만들어내는 것 또한 놀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추억을 만들고, 추억을 진하게 각인하는 것으로 사진 몇 장은 시시하다. 이런 자리에 예술이 오면 좋겠다.
아이들의 삶에서 쌓인 경험을 진한 추억으로 남기는 예술이 강원도의 예술 교육이면 좋겠다. 한 아이의 경험으로부터 출발하고 아이가 중심이 되는 교육, 아이들만의 야성이 꿈틀거리는 교육, 갇힌 틀을 깨버리고 삶과 자연에서 아름다움을 창조하는 교육, 예술을 만나는 모든 순간 순간도 자유로운 교육이 강원도의 예술 교육이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