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있다 | 현장이 있다

평화, 근육이 되다

김지나 / 감각사회연구소, ‘18.9月

“모르겠어요. 그냥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어요.”

십대들의 상황극 중이다.
극의 설정은 탈영병이 발생하여 같은 부대원들이 동료였던 그를 수색하고 추격하는 상황. 상황극에 참여한 십 대들은 탈영병과 그를 찾는 부대원들로 역할을 나누었다.
“ㅇㅇㅇ일병이 무기를 든 채 탈영했다. 누군가 해를 입을 수 있는 극단적이고 위험한 상황이다. 빨리 그를 찾아라.”라는 상관의 명령으로부터 극은 출발한다.

수색에 나서기 앞서, 부대원들은 총을 들 것인지 안 들 것인지 스스로 생각했다. 부대원1과 3은 무기를 지닌 탈영병이 무슨 짓을 할지 알 수 없으니 “총이 필요하다.”고 했고 부대원 2와 4,5,6은 “총을 가져가지 않겠다.”고 했다. 각각의 선택에 따라 두 명이 총을 들었고 수색이 시작되었다.

그런데 탈영병을 수색하는 과정에서 부대원 1이 갑자기 도망쳤다. 그러자 잠시 혼란스러워 하던 부대원들은 탈영병과 부대원1, 둘 다를 수색하기 시작했고 부대원 1을 먼저 발견하여 적극적으로 추격했다. 도망치다 막다른 길에 몰린 부대원1이 뒤를 돌아 부대원들을 향해 총을 겨눈다.

부대원2 : “총을 내려놔. 왜 도망치는 거야? 그리고 왜 우리에게 총을 겨누는 거야? 우린 탈영한 ㅇㅇㅇ을 쫓고 있었잖아. 우린 같은 편이야.”
부대원1: “너희부터 총을 내려놔. 너희도 내게 총을 겨누고 총이 있잖아.”
부대원2: (뒤를 돌아보며 함께 총을 겨누고 선 한 부대원3을 발견하고는 총을 달라는 눈짓을 보내어 건네받는다. 총을 어찌할지 몰라하는 몸짓으로 세로로 세워 들고 자신의 몸 뒤로 숨기다가 다시 생각한 듯, 땅에 내려놓는다.) “내려 놓을께. 너를 겨누는 총이 아니야.”
부대원1: (부대원2가 땅에 내려놓은 총을 줍고 말없이 자신의 총구는 다시 무리를 향해 겨눈다.)
부대원2: “총을 내려놔. 우리도 총이 없잖아.”
부대원1: (불안해하다가 마지못해 겨눈 총부리를 거둔다.)

무장한 탈영병을 찾는다는 설정이 가진 긴장감은 부대원1의 이탈로 인한 돌방상황에서 그에게 집중되었고 그렇게 일단 해소되었다. 부대원들은 서로 간격을 벌린 채 천천히 걸으며 다시 수색을 시작했다. 탈영병이 숨은 텐트를 곧 발견했고, 사방에서 둘러싸고 포위망을 좁혀 들어가며 가볍게 무장 해제했다.

상황극이 종료되고 십대들은 공연장에 모였다. 선생님은 부대원1에게 질문한다.
선생님: “탈영병을 수색하고 있었잖아? 그런데 왜 도망간 거야?”
부대원 1: “모르겠어요. 그냥 최대한 멀리 도망가고 싶었어요.”
수업은 종료되었다. 이 상황극에 대한 수업은 다음 시간 연속 진행될 예정이다.

쫓던 자는 왜 쫓던 역할로부터 도망쳤을까. 상황극이 시작하기 전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던 상황이었을 것이다. 전우였던 친구가 무장을 하고 탈영한 객관적 상황. 상관이 극단적이고 위험한 상황이라고 정의하는 비관적인 상황. 탈영병을 찾고 설득하고 대치하는 상황일 거라는 예상을 벗어나게 한 이유는 무엇일까?

탈영병에 대한 사건 상황을 토론하는 자리였다면 어땠을까. 탈영병에 대한 옳고 그름, 국가를 지키는 집단의 책임과 의무, 공공의 안녕을 위해 집단 안의 개인들이 치러야 하는 댓가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을까. 결국 쟁점은 처벌이고, 처벌의 무게가 되지 않았을까. 철학적 질문에 말로 답하는 것은 이성의 일이다. 가치관과 옳고 그름에 대한 토론은 개념적이다. 말은 은유적이고 추상적이다.
하지만 상황극은 혁명적이게도 이 질문을 모든 ‘자기’에게 던진다.
나의 관점으로 옮겨진 상황, 몸의 입장으로 다가온 현실 앞에서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경험을 통해 감각이 내어놓는다. 그 후에라야 왜 그랬을까를 경험으로 논하는 몸의 철학이 작동한다.

극은 모든 고민의 지점들을 ‘자기화된 경험’의 관점으로 옮겨놓는다. 경험은 생각을 현실로 만든다. 친구를 쫓아야 하고, 총을 들어야 하는 그 모든 상황에 놓이고 나서야 느껴지고 이해하고 알아 차려진다. 서로를 지킨다고 생각했던, 안전하다고 믿어왔던 ‘우리’라는 틀이, 벗어나려는 자에겐 벗어날 수 없는 가혹한 폭력의 양면성이었음을 몸이 직감한다. 몸은 그 깨진 평화로부터 달아난다. 탈영병을 향하던 걱정과 우려는 시간만 지나면 쉽게 응징의 에너지로 바뀐다. 그리고 탈영병에서 자신에게로 방향이 바뀌어도 동일한 에너지가 팽창한 긴장감을 타고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것을 목격한다. 자신을 설득하고 무장해제하려는 무리 앞에서 그 친절하고 무서운 힘이 가진 정당성에 자신도 화가 난다.

평화라는 믿음이 깨지고서야 갈증처럼 느껴지는 평화에 대한 욕구. 그 뒷이야기가 궁금하다.
비로소 배고픔처럼 실제로 감각하게 된 ‘평화’에 대해 그들은 오래 사유하고 그 사유를 몸으로 내재화할 것이다.

이것이 연극이라는 방법을 통해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살아갈 것인지’를 창조하는 삶의 예술이다. 화천에 있는 문화공간 예술텃밭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꿈다락토요문화학교는 올해 <감정! 미움 그리고 평화>에 대해 경험적 사유를 해나가고 있다. 극단 뛰다의 선생님들과 지역의 십 대가 함께 하는 몸의 학교인 셈이다.

이들은 다양한 상황극을 통해 십대들은 가족, 교육, 지역, 사회공동체에서 일어나는 문제들을 몸으로 마주한다. 미움은 처리해야 하는 물건같은 감정이 아니고, 느끼고 이해하고 소화하는 내 몸의 일부임을 말이 아닌 몸으로 터득해간다. 평화에 대해 배우지 않고 평화 감수성과 근육을 기른다.

평화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형욱은 ‘고통이 사라지고 열리는 새로운 신세계’라고 하고, 주형은 ‘소중하게 다루어야 할 평소의 행복’이라고 하고, 지원은 ‘우리(같이)’라고 하고, 응빈은 ‘No war’라고 하고, 채은은 ‘아무 걱정 없는 하루’라고 하고, 민지는 ‘근심없이 잠드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이는 몸으로 철학하는 자들의 선문답이다.
평화주의자가 아니라, 평화 감수성을 가진 몸의 교사들이 매주 아이들과 함께 세상의 우문(愚問)에 대해 몸의 언어로 현답(賢答)한다. 평화가 선언문이나 역사책이나 국가전략에 있지 않고, 내 하루하루에, 함께 살아감에 있어서, 매일 느끼며 살아갈 수 밖에 없는 공기 같은 것이라고.

극단 뛰다는 지역에 산다. 지역의 공기를 하루하루 함께 마시고, 지역의 햇볕을 하루하루 같이 쬐며, 지역의 아이들을 ‘자신의 세상을 예술로 만드는 창조자’로 함께 기르며, 십 대의 금보다 귀한 하루하루를 함께 살아가며 마음과 생각이 몸으로 일체화 되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