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생각과 마음을 잇다 | 생각을 잇다

‘평화’의 구체적 현존

김시종 시집 「지평선」

소종민 / 문학평론가, 18.9月

불안한 평화

질 듯 질 듯 한 해가 떨어지고
저녁 식사도 마치고 풍경이 새로운 저녁 바람을 전할 무렵
길가 곳곳 평상에는
유카타 차림에 편안한 밤 이야기꽃이 핀다
담소를 섞어가며 올려다본 불꽃놀이에 이야기가 뒤얽혀
폭파로 날아간 팔이나 살덩어리의 피비린내도
어느새 괴담으로 옷을 갈아입다니 정신없다.

여름밤 꿈은 커다랗고
아이크의 위성발사로부터
우주여행 로켓까지
손자의 지식에 조금의 착오도 의심도 없다.
할머니는 호들갑스럽게 눈을 크게 뜨고서
“어째 그런 일이 다 있다냐!
원자력은 폭탄이잖아”
8천 미터 상공 바다를 건너온 비행기에만
관련된 순례의 날들.

아버지는 입을 다물고 석간신문을 탐독하며
딩동댕동 하고 울려 퍼지는
미오쓰쿠시 종(鐘)이 귀로를 더듬는다.
불꽃놀이만으로도 집이 날아갔는데
어네스트 존이 일본에 오고
원자포(原子砲)가 오키나와에 왔다고 한다.

어린아이들이 말해서 위를 보니
얼마나 달이 크고 가깝던지.
                                    (「아이와 달」 전문*1), ※밑줄은 필자)

*1) 김시종, 「지평선」(소명출판, 2018) 56~57쪽. 이하, 본문에 인용되는 시들은 모두 「지평선」에 수록되어 있다.

이렇게 해보자. 위의 시에서 밑줄 친 대목만 빼고 읽어보라. 그렇게 읽을 때, 우리의 상념에는 바람도 선선한, 어느 조용하고 정갈한 도회지 길가 풍경이 떠오를 것이다. 한 세계가 가만히 순하게 흘러간다. 안정되어 평화롭다. 이번엔 밑줄 친 대목을 넣어서 다시 읽어보라. 이 좋았던 초저녁 풍경이 금세 아슬아슬하게 느껴질 것이다. 떨어져 나간 육신, 비행기, 원자포, 피비린내와 같은 무거운 질량의 낱말이 평안한 세계의 시공을 뒤흔들어 놓기 때문이다. 태풍 속의 고요처럼 불안한 평화일 수밖에 없다. 이런 지경을 과연 평화라고 말할 수 있을지도 의심된다.
언뜻 참 모질다 싶지만, 그렇게 해야만 우리가 의식하지 못한 채 누리는 평화의 모습을 재차 삼차 뒤집어 볼 수 있다. 나아가 ‘평화’라는 낱말의 쓰임새를 비판적으로 진단하고, 평화 개념의 정치ㆍ경제적, 사회ㆍ문화적 역할을 재구성하고 재조정하는 데까지 도달하는 계기가 된다면, 시 한 편의 힘은 충분히 발휘된 것이다. 더불어 우리 현대사의 통점(痛點)을 온몸으로 감수하며 한 발씩 밀어 온 시인의 삶*2) 을 견주어 본다면, 평화에 관한 이질적인 상(像)을 제시하는 시인의 의도를 여러 번 다시 되짚어 볼 필요마저 있다. 그래도 여름 저녁 길가 평상에서 할머니와 어린아이가 도란도란 얘길 나누고, 그걸 엿들은 시인이 위를 올려다보며 ‘얼마나 달이 크고 가깝던지’ 하고 툭 던지는 말 속에는 ‘이런’ 평화가 오래 지속되길 바라는 마음이 배어 있다고 할 것이다. 풍경의 이면을 지배하려는 폭력의 실상을 근심하면서 이 한순간의 아름다움에 감응하는, 두 겹의 심리가 움직인다. 그것으로 우리는 시인의 마음에 닿게 된다.

*2) 김시종 시인의 삶에 대해서는, 「조선과 일본에 살다-나에게 8ㆍ15란, 4ㆍ3이란 무엇이었나」(돌베게, 2016)라는 시인 자신의 자서전을 참고하길 바란다.

평화의 적들

시인이 바라는 평화는 멀기도 하고 가깝기도 했다. 시인이 벗들과 함께 움직일 때 평화는 가까이 있었고, 벗들과 떨어져 움직이지 못한 채 고립될 때 그건 멀리 있었다. 시인과 평화 사이에는 세계가 있어, 그 세계의 실상이 시인의 감정과 이해를 일방적으로 지배할 때엔 평화는 멀어진다. 반대로, 세계 운행의 비밀을 깨닫는 해득력으로 그 진로를 변경하는 행동을 감행할 때, 평화는 시인의 편으로 다가온다. 이를테면, “꽃의 파리 천국에서/ 다섯 아이 어머니가/ 가스관을 물고 죽었다 하네/ 돈이 없어/ 배고파 견딜 수 없다/ 써 놓고서 죽었다 하네”(「신문기사에서」)와 같이 사태에 개입할 여지없이 일방적으로 전달되는 먼 나라의 비극적 사연은 시인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무의지적으로 연상이 일어날 때는 더 도리가 없다. 아마도 시인은 우연히 오사카의 시바타니 매립지에 사람 크기만 한 참치를 수천 마리 파묻는 것을 본 듯한데, 문득 눈을 크게 뜨며 놀랐던 것 같다. 시인은 이렇게 썼다. “나는 이전에도/ 이러한 장례식을 알고 있다./ 탄 사체는 분명히 검게 그을렸는데/ 시대는 산 채로, 목숨을 끊고 사라졌다.”(「처분법」) 그건 오사카로 밀항해 오기 전, 1948년 4월 제주에서 보았을 것이다. 시인의 나이 열아홉 때의 일이다. “인간이란/ 이 정도로 하잘것없는 존재인가?”(「우라토마루[浦戶丸] 부양」) 하며 회의와 절망에 휩싸였으리라.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개조차 시인을 수동적으로 감응시키곤 했다. “너를 바라보고 있으면/ 나마저, 이상하게 똥에 파묻혀 가는 듯하다/ 깡마른 목을 쭉 뻗고서/ 홀쭉해진 넓적다리에 꼬리를 감고서/ 멍한 시선을/ 한입 먹을 때마다 이쪽으로 던진다.”(「타로」) ‘타로’라는 이름의 동네 개는 똥을 먹으면서도 눈치를 본다. 이건 이카이노에서 늘 목격할 수 있는 조선인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이 아닌가! “오늘도 체포된 조선인./ 암시장 담배를 만드는 조선인./ 어제도 압류 당한 조선인./ 탁배기를 제조하는 조선인./ 오늘도 깎고 있는 조선인./ 고철을 줍는 조선인./ 지금도 찌부러진 조선인./ 개골창을 찾아다니는 조선인./ 어제도 오늘도 조선인./ 폐지를 줍는 조선인./ 밀치고 우기는 조선인./ 리어카가 손상된 조선인.”(「재일조선인」) 조국이 해방되었는데도 귀향하지 못했거나 그 조국의 사정이 너무도 참담하여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 조선인 대다수는 오사카의 쓰루하시역 근처 이카이노(猪飼野)에 모여 살았다. 시인도 줄곧 그곳에서 머물렀다. 조선인들은 대체로 일본인들을 떠받치는 온갖 잡스런 허드렛일로 연명하였다. 세계는 시인에게 좀처럼 여지를 내주지 않았다. 악몽의 나날이었다. “울고 있을 눈이/ 모래를 흘리고 있다/ 나는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비명을 내질렀는데,// 지구는 공기를 빼앗겨/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노란 태양 아래/ 나는 미라가 됐다// 지구는 차갑고/ 부모님조차 이런 나를 잊었다”(「악몽」) 세계는 시인의 꿈조차 지배하려 들고 있었다. 게다가 늘 굶기 일쑤였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시인이 오사카에 도착한 지 2년 만에 전쟁이 터지고 말았다. 6ㆍ25전쟁에서 일본은 미군의 군수기지 역할을 자임하며 조선의 운명에 재차 개입하였다. 전쟁은 점점 시인의 생각과 감정을 사로잡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의 불쾌함을 담아서 하천은 흐른다.
밤하늘을 따라 폭격기가 날아가고 있다.
내 바로 위 일직선으로 조선을 향해 날아가고 있다.
                           (「거리(距離)는 고통을 먹고 있다」 중에서)

시인은 가만히 앉아만 있을 수 없다. 철로에 체인으로 몸을 묶어 열차 이동을 지연시킬 목적으로 행동대를 조직하여 오사카의 스이타역을 점거하는 시위를 벌인다. 시인은 당시의 사건을 회고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다행히 그날 군수열차는 운행되지 않아 큰일 없이 마무리되기는 했지만, 25일 미명의 별이 총총한 하늘 아래 국철 센리오카 앞의 완만하게 꺾어지는 선로에 몸을 체인으로 잇고 묵묵히 누워 있던 광경은 지금 상기해도 뭉클하게 북받쳐 오릅니다.
군수열차를 한 시간 늦추면 동포를 천 명 살릴 수 있다던 당시의 저 절실한 호소는 육십 수년이 지난 지금도 반전평화를 향한 맹세가 되어 나의 마음에서 울리고 있습니다.”*3) 시인은 평화란 저절로 오지 않는다는 걸 이미 몸으로 체득하고 있었다.

*3) 김시종, 「조선과 일본에 살다-나에게 8ㆍ15란, 4ㆍ3이란 무엇이었나」(돌베게, 2016) 255쪽.

평화를 지향하는 일상의 싸움

시인은 모 일간지로부터 ‘정치와 문학’에 대한 글을 청탁받아 이렇게 쓴 일이 있다.

재일조선인인 나로서 말하자면, 나를 감싸는 일상 자체가 이미 정치이며, 겹겹으로 나를 감싸는 일상만이 확실한 시의 양식이 되는 나의 문학이다. 따라서 정치는 일상에서 나와 함께 있다. 설사 상대의 순수성을 믿을 수 있는 사이라고 하더라도, 그처럼 평온한 관계가 자아내는 비정치적인 무언가가 나의 생존을 규제하는 힘에 무방비하고 무관심하다면 그 관계는 나를 해치는 것과의 대치 속에 자리한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비정치적인 것이 가장 가차 없는 정치력으로 작동하는 연유다.*4)

*4) 김시종, 「정치와 문학」, 「재일의 틈새에서」(돌베개, 2017) 221쪽.

그러므로, 시인에게 자신의 몸과 마음, 느낌과 생각이 일어나는 자리가 곧 싸움의 장이다. 사는 일 자체, 재일(在日)이라는 현존 자체, 일상에서 보고 듣고 말하는 자체 모두가 싸움이다. 싸움을 좋아해서가 아니라 세계가 시인에게 줄곧 싸움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시인은 결코 싸움을 피하지 않는다. “밤이여 어서 오라/ 낮만을 믿는 자에게/ 무장한 밤을/ 알려줄 터이니.” “밤이여, 어서 오라 오라 오라/ 사람과 말이, 꽃이/ 땀투성이다……………”(「밤이여 어서 오라」) 모든 역사는 과연 밤에 이루어지는 걸까? 시에서 ‘무장한 밤(armed night)’은 역시 시인에게 유리한 싸움터다. 시인은 어둠에 익숙한 촉수를 지녔다.
이른바 ‘평화의 적들’을 만나면, “자아, 모두 힘껏 웃는 얼굴로 놈들을 맞이하자./ 내민 손을 잡아라./ 하지만 물고 늘어지면 안 된다. 놓아서도 안 된다./ 우리를 몰아세운 그 손이라 해도―/ 우리의 집을 불태운 그 손이라 해도/ 우리는 그저 은근히 예를 표하면 된다./ 고개를 숙이며, 말을 하면 된다!/ “손을 다치지 않으셨나요?”하고 말이지.”(「밤의 중얼거림」)라는 주문과 격려와 기술도 제시한다. 최선을 다해 당당하게 세계와의 싸움에 임하는 것. 심리적ㆍ의지적 빈틈을 주어서는 안 된다는 것. 여유를 잃어서도 안 된다는 것. 새로운 이미지 하나는 이 밤의 전사들이 사실 ‘불’이었다는 거다. “비 오는 폭탄의 나날/ 지하에서 호흡해 온 불이다/ 어떤 야욕도/ 우리의 불을 끌 수 없을 것이다”(「정전보(停戰譜) 2-밤」). 추측건대, 이 불의 온도는 서늘할 것이며, 빛깔은 푸르스름할 것이다. 꺼지지 않고 영원히 타오르는 민중의 불은 그런 형상을 하고 있다.
한편, 밤의 전사들은 사납지 않다. 민중의 연민과 지혜로 무장되어 있어서다. 그들은 “한정된 이 세상에 목소리조차 내지 못하는 존재가/ 심려돼 어찌할 바를”(「먼 날」) 모르는 이들이다. 이들은 싸움에서 참여하여 죽음에 이르러서도 “한 명 정도/ 제대로 된 망령은 없는가!?/ 쌓인 진흙을 제거하고/ 겨우 인양한 배의 창고 안에/ 책상다리를 하고서/ 남루한 셔츠의 가슴을 털면서/ 껄껄 웃고 있는 듯한”(「우라토마루 부양」) 포즈를 멋지게 취할 줄 안다. 그러므로 시인은 평화의 적과 대적하는 싸움에서 오히려 평화로워 보인다. 어쩌면 평화는 적에게 점령된 세계와 싸움을 벌이는 과정에 이미 내재되어 있는 듯하다.

무의 존명력(存命力)이
인간의 삶에 암시를 주는 듯하다.
불사신인 그 몸은
몸이 잘려 나가고 속을 도려내어도,
한 되 십전의 수돗물
몇 방울 물에 행복해 하는 한
삶을 포기하지 않는다 한다.
게다가 거꾸로 매달려서
모양으로 구부러져서 싹을 위로 솟아나게 하는 모양은
엄청난 교훈을 자각하게 한다고 하지.
(…)
왕성한 생명력이
교훈을 위해 산제물이 되다니
말도 안 되는 철학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적어도 내 삶은
습성이 아니다.
                                    (「산다는 건」에서)

시에서 ‘무’는 ‘없음’이 아니라 ‘먹는’ 무다. ‘엄청난 교훈’이란 민중의 지혜와 생명력이며 또 평화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는데, 그렇지만 그 교훈 하나 달랑 얻기 위해 일부러 ‘무’를 습관적으로 희생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적어도 내 삶은/ 습성이 아니다.” 그렇다면 무엇인가? 지극히 어려운 싸움의 나날에서 체득된 생명력이다. 속이 패이고 몸이 잘려나가는 숱한 패배를 겪은 지혜다. 그렇기에 자연사(自然史)적인 습성일 수 없다. 그러므로 봄이 오면 시인은 싸움의 흔적을 이렇게 기억하려 한다. “나는 한 송이 진달래를/ 가슴에 장식할 생각입니다./ 포탄으로 움푹 팬 곳에서 핀 검은 꽃입니다.” 아마도 미래의 전사이자 시인이 될 이들도 이렇게 무장할 것이다. “무심히 춤추듯 나는 나비도/ 상처로부터 피의 분말을 발라/ 암꽃술에 분노의 꿀을 모읍니다.”(「봄」) 오랜 싸움 끝에 시인은 마침내 이렇게 선언한다. “아버지와 자식을 갈라놓고/ 엄마와 나를 가른/ 나와 나를 가른/ ‘38선’이여,/ 당신을 그저 종이 위의 선으로 되돌려주려 한다.”(「당신은 이제 나를 지시할 수 없다」) 평화의 적들에 의해 그어진 ‘38선’은 패배의 흔적이다. 하지만 마침내 시인은 세계와의 싸움을 통하여 평화를 자신의 편으로 끌어오는 기술과 힘을 지니게 되었음을 당당하게 표명한다. 그러므로 38선은 허구의 선에 불과하며, 이미 시인과 민중은 38선에 개의치 않고 넘나들며 행동과 사상에 구애받지 않고, 더 거대한 싸움을 치러낼 무장을 마련하고 있음을 알린다.

평화란 무엇인가?

‘밤’이라는 싸움터로 진입하려면 일차적 인식(또는 깨달음)에 도달해야만 한다. 그것은 바로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라는 인식이다. 그래야 “새로운 밤”을 맞이하여 평화에 다가서는 싸움을 벌일 수 있다. “자신만의 아침을/ 너는 바라서는 안 된다./ 빛이 드는 곳이 있으면 흐린 곳이 있는 법이다.// …/ 다다들 수 없는 곳에 지평이 있는 것이 아니다./ 네가 서 있는 그곳이 지평이다./ 틀림없는 지평이다.// …/ 진정 새로운 밤이 기다리고 있다.”(「자서」) 그 인식이 없다면 ‘낮만을 믿는 자’들에게 늘 포획될 수밖에 없다. 평화 역시 더 멀리 물러날 것이다.
한편, 시인은 식민과 분단의 사슬에 묶여 희생된 이들을 위하여 “흰 쌀밥 골라/ 배고픈 마음의 넋에게/ 맘껏 드시라며 불단에 올린다”(「박명」). 또 폭우에도 불구하고 ‘국방군 18만 증강’이라는 어두운 신문을 배달하는 소년의 온기를 잊지 않으려 한다. “손에 든 신문의/ 정말 따스한 그대의 온기가/ 지금, 내 손바닥으로부터 정수리로 스며들어 갔는가……”(「취우」) 그리고 어머니. “태백산의 수맥을 타고/ 나는 지금 당신의 고동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 내가 자란 든든한 풀을/ 확인하기 위해/ 나는 지금 당신이 내쉬는 숨결의/ 고동을 듣고 있다// 쿵쾅 쿵쾅/ 쿵쾅 쿵쾅”(「품-살아계실 어머님께 보내며」) ‘내가 자란 든든한 풀’을 확인하기 위해서 어머니의 숨결을 한결같이 재생시킨다. 진실한 싸움이 있지 않고서는 얻기 어려운 재생일 것이다.

오늘을 원한다!
창문을 열자마자
맹렬한 바람이 안으로 들어와서
모든 것을 다 날려버리고
피부 깊숙이 유리창 파편을 박아 넣었다
(…)
아파! 이게 진짜라면
이 상처는 영원히 오늘을 기억하겠지
                                    (「악몽」에서)

이 시는 현실의 어떤 가혹한 고통이 일련의 가학적 쾌감으로 전이되는 느낌을 준다. 그렇지만 이 대목은 ‘꿈’마저 지배하려는 세계의 비참한 실상에 굴하지 않는 의지가 생생하게 표현된 것으로 보는 편이 옳다. 이육사의 시 「절정」에서 느끼는 ‘세계-끝의 의지’에 비견될 만하다. 김시종은 삶과 죽음의 극한을 경험한 사람으로서 표현할 수 있는 ‘어떤 절정’에서부터 아주 낮고 미세한 존재의 율동에 이르기까지 찬찬히 보고, 가만히 더듬는 매우 귀한 시인이다. “굶주린 동포 한 명이/ 이 땅에서는 신기한 수저를 캐왔다./ 녹슨, 모국제 수저 하나다.// 모두 손을 내려놓고/ 너무 신기해 넋을 잃고 보고 있다./ 그리고, 각자 알 수 없는 미소를 띠었다.”(「녹슨 수저 하나」) 이렇게 시인은 녹슨 수저 하나에서도 ‘공존의 미소’라는 보석을 캐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길가를 떠도는 잡초에서도 민중의 힘을 가만히 운산(運算)하는 놀라운 지각을 지녔다. “끊임없이/ 트럭이 오가는 길가에/ 뒤얽히고, 파손된 채로/ 먼지를 받고 있던 잡초―// 설령 그것이/ 현재 사회와의 무관계한 번식이라 해도/ 나는 이 의지를/ 무시할 정도의 용기가 없다.// 고쳐 앉아,/ 모르는 척을 하고,/ 나는 그저 떨어질 때까지/ 바지 자락의 이 녀석을 운반할 것이다.”(「살아남은 것」)
강렬한 의지와 섬세한 감각 그리고 윤리적 일관성. 이것이 시인을 표현할 수 있는 추상적인 낱말들이다. 하나 더 추가하자면, 크나큰 품에서 우러나오는 꾸밈없는 해학이다. 우리는 시인 김시종이라는 존재로서 ‘평화’의 구체적 현존을 동시대에 목격하는 행운을 누리고 있다. 그의 시를 읽는 행위로써 우리는 평화에 한발 다가서게 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