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생각과 마음을 잇다 | 생각을 잇다

예술하며 놀고들 있다

손서은 / 소설가, ’18.7月

꿈은 당장에 급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꿈을 세우기 전에 나를 조사하자. 나를 기쁘게 하자. 나를 위한 일을 하자. 어려서부터 스스로 즐거운 삶을 산 아이는 커서 좀비가 되지 않는다. 자기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리 좀비들한테 뜯어 먹혀도 변신하지 않는다. 그게 그들의 힘이다.

나는 가끔 스타벅스에 간다. 글 쓰는 작업을 하기 위해서다. 어떤 작가들은 호텔방에서 제일 글이 잘 써진다고 하고 어떤 작가는 소설을 쓰기 위해 몇 달간 레지던시에 처박히기도 하지만 대부분의 작가들은 기껏해야 카페로 간다. 특히 나처럼 별도의 작업실이 없는 작가는 쌓인 설거지와 냄새나는 빨래와 굴러다니는 먼지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일단 도망쳐야 일이 된다. 무진공의 고요함이 압도하는 도서관 말고 백색의 소음이 떠다니는 곳에서 완벽한 작업 환경이 만들어진다. 그럴 듯하다. 그런데 이게 다 핑계다. 실은 사람 구경을 하러 간다.
스타벅스에는 늘 사람이 많다. 어떤 때는 엄청나게 긴 줄이 입구까지 늘어서 있다. 다녀본 바 이만큼 널찍하고 익명이 보장되며 오래 앉아 있을 수 있는 곳도 흔치 않다. 커피를 받아들고 노트북을 펼치면 그 와중에 나만의 세계가 펼쳐진다. 일의 순서는 이렇다. 젊은 얼굴로 구성된 바리스타들의 날랜 손동작과 활기차게 주문 받는 모습을 홀린 듯 구경하다 오늘 오신 고객님들을 몰래 힐끔거리며 자판을 두드린다. 이른 아침에는 나와 비슷한 종족이 꽤 있다. 벽에 나란히 붙어 앉아 콘센트에 노트북을 연결하고 앉는 자들이다. 동족 간에 흐르는 이상한 기류 탓에 괜한 긴장감이 넘치므로 멀찍이 떨어져 앉는 게 상책이다. 점심시간이 되면 완전히 새로운 판이 깔리는데 수트 차림의 세련된 직장인들이 주인공이다. 이때가 하루 중 가장 혼을 빼놓는 시간이다. 자리는 모조리 점령당했고 허공에 부딪친 말과 말이 서로 만나면서 실내 공기가 뜨거워지고 천정이 쩡쩡 울리도록 소란하다. 나의 눈초리는 여기저기로 사정없이 옮아가고 타자속도는 더욱 빨라진다. 뭐가 됐든 이곳에는 에너지가 있다. 나는 오늘도 그걸 찾아 여기 앉아있는 것이다.
카페에 앉아 글 쓰는 작가는 왠지 있어 보인다. 그러한 판타지는 런던의 한 카페에서 해리 포터를 완성했다는 작가 조앤 롤링 이전에 캐리 브래드쇼가 먼저 조장했다. 캐리는 90년대 전성기를 누리던 드라마 섹스 앤드 더 시티의 주인공이다. 극중에서 그녀는 프리랜서 작가로 나오는데 침대에 앉아서 파자마 차림으로 글을 쓰다가 잘 안 풀리면 밖으로 나간다. 바깥세상은 뉴욕 맨해튼이다. 모델처럼 화려하게 차려입은 캐리는 아이북 (그 당시만 해도 애플 노트북의 이름은 아이북 이었다.)을 손에 들고 한창 유행하는 디저트카페와 비건 레스토랑, 버킨 매장을 순서대로 훑고 마침내 스타벅스에 당도한다. 그녀가 아메리카노를 앞에 두고 별 고민도 없이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면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그렇게 생산된 글은 패션 잡지 보그가 단어 당 4달러에 사 간다. 믿어지는가. 한 단어에 4달러다. 이런 효율적이고 안정된 시스템이라니. 그녀는 뉴욕에서 가장 핫한 카페에서 친구들과 브런치를 즐기고 몇 블록만 걸어가면 나오는 갤러리에서 현대 미술의 트랜드를 익히고 주말 밤이면 요트에서 벌어지는 파티에 참석한다. 그녀는 작가치고 꽤 화려하다. 아니, 저것이 작가적 삶이라면 더 바랄게 없어 보인다.
섹스 앤드 더 시티를 보고 자란 나는 이제 작가가 되었다. 캐리처럼 스타벅스에서 글을 쓴다. 자주는 못 간다. 내가 생산하는 글은 단어 당 4천원을 보장하지 않는다. 그럼 A4 한 장당 4천원은 나오는가. 불행히도 오늘 생산한 글이 내일의 수당이 되어 돌아오지 않는다. 보장성 없는 일이다. 그럼 그게 무슨 직업이냐고. 제대로 찔렀다. 직업의 의미가 지속적으로 돈 버는 일을 뜻하는 거라면 글쎄 작가는 직업이 되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럼 취미인가. 한창 영화를 하겠다고 설칠 때 아버지가 그랬다. “너 취미생활 언제까지 할 거냐.” 그런데 하루도 빠지지 않고 온종일 하는 취미도 있나. 이쯤 되면 직업으로 인정해 주면 안 될까. 정체가 모호하다. 그런데 그게 바로 예술의 정체다.
예술은 참 쓸모가 없어 보인다. 부모는 아이가 뮤지컬배우가 되겠다고 하거나 싱어 송 라이터가 되겠다고 하면 겁부터 먹는다. 세상에. 그거 해서 먹고 살수나 있겠니. 또 있다. 예술가가 되겠다고 하면 따라 붙는 집요한 질문. “너한테 진짜로 재능이 있다고 생각해?” 오싹하다. 많은 이들이 여기서 무너진다. 재능이 있으면 어떻게라도 성공해서 먹고 살 수 있을 텐데 나중에 재능이 없다는 게 밝혀지면? 진짜 망하는 거다.

망하지 않기 위해서는 몸을 사려야 하고 몸을 사려서는 예술의 길로 들어설 수 없다.

되묻고 싶다. 의사나 변호사, 대기업의 회사원에게는 재능이 필요하지 않은가. 뭐가 됐든 노력과 재능은 동시에 요구된다. 재능이란 발굴되고 훈련되는 것 아니던가. 유독 예술가에게만 특별한 재능이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은 조작된 논리다. 그렇게 왜곡된 예술세계는 특정 부류에만 문을 열고 그 세계를 더욱 좁게 한다. 작가가 될 길은 소원해지고 작가지망생들은 자신의 재능을 의심하거나 밥 굶는 것이 두려워 포기하고 마는 것이다.
초등학교 1학년만 되도 학교는 아이들에게 꿈을 묻는다. 그런 질문에 당황하는 아이는 없어 보인다. 축구선수. 영화배우. 로봇과학자. 기타 등등. 서슴없이 장래 직업을 댄다. 혹시 꿈이 없다는 아이가 있으면 대충 아무거나 골라잡는 게 좋다. 남들 보기에 없어 보인다. 그런데 꿈은 직업인가. 초등학교 때 미래의 직업을 살피는 것이 왜 중요할까. 그건 그렇고 얘들은 뭘 알길래 당차게 자신의 꿈을 설파할 수 있는 걸까. 요즘 애들 똑똑하다더니 그런가보네. 대화를 나눠보면 실제 그렇다. 아이들은 나중에 뭘 해서 먹고 살지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 한다. 인생의 플랜이 딱 그려져 있다. 멋지다. 그런데 네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건 뭔데? 제일 자신 있는 건? 뭐가 재미있는데? 물으면 시들한 대답만 돌아온다. 그런 건 다 됐고 지금은 수학 문제를 여기까지 풀어야 하고, 영어단어를 저만큼 외워야 하고, 피아노 레슨을 따라잡아야 하니 딴 거 신경 쓸 겨를이 없단다.

질문이 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 신경 쓸 겨를이 없는데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있는가. 내가 누군지 모르면서 장래에 뭘 할지 정할 수 있나. 꿈이란 거 좀 없으면 어때. 어려서는 그냥 살아도 되지 않나. 그러던 애들이 청소년이 되면 좀 심각해진다. 현실과 꿈의 격차가 현저하게 드러나면서 도무지 해결점을 찾을 수가 없게 된 거다. 신나게 살아야 할 시기에는 꿈이라는 강박 때문에 기가 죽고 막상 어른이 되어서는 좀비처럼 그냥 산다.
꿈은 당장에 급한 일이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꿈을 세우기 전에 나를 조사하자. 나를 기쁘게 하자. 나를 위한 일을 하자. 어려서부터 스스로 즐거운 삶을 산 아이는 커서 좀비가 되지 않는다. 자기 정체를 아는 자는 아무리 좀비들한테 뜯어 먹혀도 변신하지 않는다. 그게 그들의 힘이다.
4차 산업혁명이 어쩌고 미래 교육이 어쩌고 세상이 시끄럽다. 앞으로 닥칠 사회는 전연 예측할 수 없으며 이제껏 살아온 방식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으니 우리 아이들을 대비시켜야 한다고. 하지만 아이들을 보라. 그들은 이미 그 세상 안에 살고 있다. 아이들은 진화의 씨앗을 품고 태어난다. 아이들은 천성이 말랑하고 유동적이며 느슨하게 흐느적대며 자란다. 그 꼴을 못 보는 어른들이 달려들어 틔우지 못한 씨앗을 거둬가고 그 자리에 기성품인 꿈을 대신 이식한다. 아직 세상 구경도 다 못했는데 아직 더 놀아야 하는데 그 자리에 끼어 든 꿈 때문에 괴롭다. 청소년이 되면 몸의 활동과 예술 활동은 빠지고 외계어와 온갖 해괴한 공식을 외우는데 인생을 다 바쳐야 한다. 뭘 하는지도 모르면서 도서관에 앉아 있고 집 밥 대신 편의점에서 혼밥을 먹고 학원으로 향한다. 재미가 빠진 일상. 내가 빠진 일상이 청소년들의 삶에 난입했다. 육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의 아이들은 사각의 공간에 갑갑한 교복을 입은 채로 하루 종일 앉아있고 운동장은 텅 비었다. 노래하고 작곡하고 힙합을 작사하고 악기를 연주해야 하는 음악실이 사라지고 미술수업은 시험 때가 되면 자율학습으로 제 시간을 넘겨준다. 물론 글쓰기 수업 같은 건 있지도 않다. 학교에서 예술이 사라졌다. 고로 즐거움도 사라졌다.

“뭐라고요? 예술이 사라졌다고요?”

다큐멘터리 <다음 침공은 어디?> 는 감독인 마이클 무어가 미국 국기를 들고 전 세계를 침공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어디를 침공하느냐. 좋은 먹거리, 일하기 좋은 환경, 무상 교육, 양성이 동등한 나라 등등을 돌아다니며 그들의 칭찬받아 마땅한 아이디어를 약탈해 오는 것이 목적이다. 그는 교실보다 놀이터가 더 큰 학교, 아이들에게 실컷 놀라고 종용하고, 시험은 치루지 않는 핀란드의 교사들이 어이없다. 그가 보기에 이들은 체육과 예술에 치우친 교육을 하고 있다. 무어 감독이 미국학교에서 예술은 사라졌다고 하자, 선생들은 경악한다.
“뭐라고요? 예술이 사라졌다고요?”
카메라는 핀란드 교사들의 얼굴을 클로즈업하는데 진짜로 놀란 눈치다. 영화를 보는 우리 대다수는 그들의 반응이 더욱 놀랍다. 그게 뭐 어때서. 우리의 마음을 대변하듯 감독이 천연덕스럽게 대꾸한다. “그럼요. 일찌감치 사라졌죠. 뭐에 필요하다고요. 대학가는 데 필요한가요, 취업하는데 필요한가요.”
예술은 무용하다. 한마디로 써 먹을 데가 없다. 마이클 무어 감독은 일부러 짓궂은 표정으로 화면을 응시하고 우리는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앉아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는 사이 우리 아이들은 예술 없는 시들한 삶을 살고 있다.
다시 뉴욕에 사는 캐리에게로 돌아가 보자. 섹스 앤드 더 시티에 나오는 모든 예술가들은 잘 나간다. 뉴욕 현대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고 대학을 갓 졸업한 젊은 패션디자이너들 조차 소호거리에 자신이 디자인한 옷을 내건다. 보그에 기고하던 프리랜서 작가는 책을 내서 대성공을 거두고 그 책은 파리에 입성한다. 모두가 탄탄대로의 길을 걷는다. 멋지게 성공한 예술가들. 이들이야 말로 어린이들의 머리에 이식된 기성품 꿈이다. 드라마는 이제 판타지를 넘어 공포 장르로 넘어갔다. 우리 봤지. 이렇게 살지 못할 거면 당장 때려 쳐.

됐다. 이제는 안 속는다.

나는 아이들에게 그깟 장벽 부수고 안으로 쳐들어가자고 하겠다.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으며 실은 우리 모두 그렇게 태어났으므로. 어려서 예술적 흥을 깨친 아이는 커서 자기 삶을 살 수 있다. 예술가가 되어야 한다는 명제는 예술에서 직업을 찾으라는 것이 아니라, 삶에서 즐거움을 찾으라는 것이다.
이제는 배경이 바뀐다. 뉴욕 맨해튼 아니고 원주 흥업이다. 논과 밭과 오리집과 작은 저수지가 이웃한다. 여기 여덟 명의 아이들이 등장한다. 손에는 커다란 종이 백을 들었다. 안에는 쓰레기가 가득하다. 평소에는 집이고 작업실이었던 곳이 순식간에 힙합 음악과 아이들의 땀 냄새, 그리고 쓰레기로 가득 찼다. 이게 다 뭐하는 작당이냐고? 예술 하는 작당이다. 강원문화재단은 신선한 아이디어로 지역의 작가들을 한데 모았다. 작가의 작업실을 열고 그 안에 이웃들을 초대해 예술적 체험을 하게 하자는 취지다. 허공에 붕 뜬 예술을 일상으로 끌어오는 작업이다. 나는 내 이웃의 청소년들과 예술 작당소를 차렸다. 판을 깔고 제대로 놀아볼 거다. 우리는 연극도 보고 춤도 추고 랩도 쓰고 조형작품도 만든다. 하는 일에 제약은 없다. 목표는 예술의 허상을 부수고 장르를 허물며 내 삶을 창조하는 것이다. 음악가, 유리조형예술가, 무용심리치료사가 우리 작당소에 초대된 지인 예술가들이다. 이들이 예술작당에 흔쾌히 응하면서 똑같이 한 말이 있다. “오호, 그것 참 재밌겠는데!”

그래. 인생은 재밌는 거였다.

어질러진 작당소에서 아이들은 처음엔 그냥 놀았다. 장난치던 손가락이 꼼지락거리면서 뭔가를 하기 시작하더니 엉뚱한 작품이 나오고 그걸 부수고 새로운 착상으로 옮아가면서 형태가 만들어졌다. 의미가 씌워졌다. 쓰레기는 그렇게 작품이 되었다. 여덟 명의 작당가들 중 예술을 직업으로 삼겠다는 아이는 없다. 그러거나 말거나. 아이들은 매번 열성적으로 모이고 신나게 작당하며 논다. 이 세계의 멤버가 된 것이다. 일상의 예술가로 사는 것. 이것이 예술의 역할 아닌가. 우리는 이렇게 예술하며 놀고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