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삶 속 문화가 핀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아몬드》(손원평/창비)를 읽고

전흥우 / 주간신문<춘천사람들> 편집인, ’18.5月

작가는 이렇게 묻는 것 같다. 희로애락의 감정을 가지고 있는 너는 다른 사람의 희로애락에 얼마나 공감을 했느냐고.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 있는 이성을 가지고 있는 너는 그 판단대로 얼마나 행동에 나섰느냐고. 그렇지 못했다면 그건 진짜가 아닌 가짜 인생이라는 질책과 함께.

“박사의 말대로 평범하다는 건 까다로운 단어다. 모두들 ‘평범’이라는 말을 하찮게 여기고 쉽게 입에 올리지만 거기에 담긴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81쪽>

책 속 대사처럼 ‘평범하게’ 산다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자의든 타의든 ‘평범함’을 빼앗긴 사람들도 너무 많다. 선천적으로 평범하지 않게 태어난 사람이야 더 말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병이나 사고로 ‘평범함’을 잃은 사람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둘째 아이가 원인불명의 청각장애인 것을 알게 된 날, 하늘이 무너지는 줄 알았다. 두 돌이 다 되어갈 때까지 그저 말이 좀 늦는 것이려니 생각해 어린이집에 보냈는데, 한 달 후쯤 연락이 왔다. 아이가 못 듣는 것 같다고. 그때까지도 ‘설마’ 했다. 일단 검사를 받아보기로 했지만 단 1%도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기에 청력이 아예 없다는 병원의 검사결과를 한동안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그 후 인공와우 이식수술을 위해 5년 동안 매주 두 번씩 서울을 오르내렸다. 수술 후 비록 기계장치를 통해서였지만 아이는 들을 수 있었고,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이로부터 “아빠” 소리를 듣게 됐다. 한참이 지나 초등학교 취학을 앞두고 아이는 한글까지 익힐 수 있었다. 벌써 중학교 2학년이니 10년도 훨씬 더 지난 일이다. 그러나 평생을 귀와 머리에 장치를 부착하고 다녀야 하는 아이의 신세를 생각하면 늘 마음이 짠해지곤 했다. 다행히 아이는 밝고 건강하게, 특수학교가 아닌 일반학교에서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지내고 있다.

처음에는 그랬다. 왜 하필 우리 아이냐고? 그것은 아무런 이유도 의도도 없는 것이었다. 과학적으로 규명하기가 어려우니 말이다. 다만 유전적 요인이 몇 대에 걸쳐 나타날 수 있는 것으로 추정될 뿐이라고 했다. 그렇게 둘째 아이는 ‘평범’하지 않은 아이가 됐다. 그러나 몇 배는 더 심하게 ‘평범’하지 않은 아이들을 보면서 그것으로 위로를 삼는 얄팍한 심사를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인가 보다. 사실 따지고 보면 몸 어디 좀 불편한 것이야 그리 큰 문제도 아니다. 선천적 혹은 사고 등으로 인한 후천적 지체장애는 발달장애나 마음의 병을 앓는 아이들에 비할 것이 아니다.

그러나 평범하고 평범하지 않은 것을 눈에 보이는 것만으로 재단할 수 있을까? 소설 속 대화처럼 사지 멀쩡하고 정신 멀쩡한 사람들은 다 평범한가? 과연 무엇을 ‘평범’의 기준으로 삼을 것인가? 작가는 “평탄함을 충족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느냐고 묻는다. 이렇게 따지만 사실 평범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저마다 아픔이 없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아마도 작가는 ‘평범’과 ‘비범’의 경계를 조소하는 것 같다. 주변을 둘러보면 지극히 평범해 보이는 사람의 마음이 심하게 병들어 있는 예를 찾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반면 평범하지 않아 보이는 사람들의 마음이 실은 평범해 보이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따뜻하고 평온하다는 것도 적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그러니 ‘평범’의 경계를 말하는 것이 무엇이 중요할 것인가?

《아몬드》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은 진심은 무엇이었을까? 이 책은 여느 성장소설과는 여러 면에서 많이 다른 것 같다. 그저 ‘알렉시티미아(감정표현불능증)’을 앓고 있는 아이와 부모로부터 버려졌다는 생각에 세상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는 아이를 내세워 그 아이들이 어떻게 세상과 소통하면서 스스로를 치유하며 성장하는지를 보여주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작가는 스스로 평범하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을 질타한다.

“멀면 먼대로 할 수 있는 게 없다며 외면하고, 가까우면 가까운대로 공포와 두려움이 너무 크다며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느껴도 행동하지 않았고 공감한다면서 쉽게 잊었다. 내가 이해하는 한, 그건 진짜가 아니었다.” <218쪽>

평범하고 아니고 보다 중요한 것은 공감능력이다. 공감보다 더 중요한 것은 동행이다. 우리는 지나치게 저마다의 삶속에 자신을 가두고 사는 것은 아닌가? 이런저런 이유와 핑계를 대며 이웃의 아픔을 외면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그리고 공감한다면서 함께 나누지 않고 너무나 쉽게 잊고 마는 것 아닌가?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사람들이 그런 마음의 장애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닌가? 그렇다면 역시 평범하지 않은 것이 아닌가? 이런 질타가 아닐까 생각한다.

갖가지 혐오가 난무하는 세상이다. 몸이 불편하다고 혐오하고, 힘이 없다고 혐오한다. 나와 다르다고 혐오한다. 장애인 혐오, 여성 혐오, 이주민 혐오, 북한이탈주민 혐오, 동성애자 혐오…. 혐오의 이유가 참으로 다양하다. 권력과 부와 명예를 가진 사람들에 대해서는 비굴하게 굴종하고, 돈 없고 힘없는 사람들에게는 지나치게 위압적이다. 소통과 공감, 배려가 끼어들 여지가 없다.

“구할 수 없는 인간이란 없다. 구하려는 노력을 그만두는 사람이 있을 뿐이다.” <113쪽>

소설 속 가공의 인물 ‘P.J. 놀란’이라는 사람이 남겼다는 말이다. 우리는 도무지 가능성이 없는 사람을 말할 때 구제불능(救濟不能)이라고 말한다. 그는 구제될 수 없는 사람은 없다고 말한다. 극악무도한 살인자라 하더라도 그의 곁에서 진심으로 공감하고 이해해주는 그 누군가가 있다면 그는 얼마든지 변할 수 있다는 것이리라. 그런 노력을 포기하기 때문에 병든 영혼을 끝내 치유하지 못한다는 것이리라.

우리는 《아몬드》를 통해 주변의 관심과 배려가 어떻게 상반된 행동으로 나타나는지 확인할 수 있다. 많은 사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가족이든 친구든 이웃이든 단 한두 사람의 관심과 배려, 소통과 공감만 있어도 한 사람을 지옥 같은 삶에서 구제할 수 있다. 그러나 곁에 그 한두 사람조차 없는 또 누군가는 자신의 삶의 지향을 저 깊은 절망의 심연으로 내동댕이치고 만다. 괴물 같은 두 아이 윤재와 이수(곤이)의 길이 엇갈리는 지점이다.

“나는 누구에게서도 버려진 적이 없다. 내 머리는 형편없었지만, 내 영혼마저 타락하지 않은 건 양쪽에서 내 손을 맞잡은 두 손의 온기 덕이었다.” <153쪽>

도무지 꿈쩍도 않을 것 같았던 윤재의 ‘아몬드(아미그달라)’가 조금씩 꿈틀대며 잠에서 깨어날 수 있었던 것은 그 아이의 곁에 엄마와 할머니, 그리고 심 박사와 ‘도라’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곤이는 어떤가? 주위에 자신을 이해해주는 사람이 하나도 없다는 데서 오는 절망감은 분노로 표출된다. 그 분노는 자신을 둘러싼 세계에 대한 거친 항의다.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학대와 포기밖에 없다. 그 분노와 자학은 왜곡된 ‘힘’을 추구한다.

“그래서. 강해질 거야. 내가 살아온 인생답게. 나한테 제일 자연스러운 방식으로 이기고 싶어. 상처받는 걸 멈출 수 없다면 차라리 상처를 줄 거야.” <194쪽>

곤이는 자기 자신을 포함해 다른 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는 것을 ‘강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어쩌면 그것은 그의 선택이 아니리라.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는 것으로써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것은 그의 ‘의지’의 발로가 아니라 막다른 골목에 부닥쳐 어찌할 바를 몰라 터져 나오는 절규일 것이다.

절망의 늪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는 곤이의 영혼을 구원한 것은 윤재였다. 윤재의 두 손에 흐르는 온기가 곤이의 손에도 전달된 것이다. 눈물만큼 강력한 치료제도 없다. 눈물만큼 뜨거운 삶의 증거도 없다. 곤이의 뜨거운 눈물을 윤재가 느꼈을 때 요지부동 척박하기만 했던 윤재의 가슴에 균열이 생기고 감정의 싹이 자라난다. 그 순간 윤재는 비로소 사람이 되었음을 깨닫는다. 변태(變態)! 그 변태는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것이 아니다. 눈에 띄지는 않지만 서서히 조금씩 번데기가 자라다 껍질을 벗고 화사하게 비상(飛翔)하는 나비처럼 이유가 있고 과정이 있다. 누군가가 윤재의 곁에 있었기에 가능한 ‘거듭남’이었으리라.

선천적으로 감정을 느낄 수 없어 로봇처럼 다른 사람과 공감하지 못해 자신만의 세계에 머물러 있던 윤재와 어릴 적 놀이공원에서 부모를 잃어 밑바닥 인생을 전전하며 세상을 향한 적개심만 가득했던 곤이이라는 두 아이. 모두 괴물 같은 아이들이었다. 아무도 가까이 하지 않는 두 아이는 서로를 이해하면서 친구가 됐고 친구가 됨으로써 사람이 됐다. 물론 그 과정은 아름답지만은 않았다. 처절했고 처참했다. 그러나 그 과정을 통해 그들은 서로를 위해 자신의 가장 소중한 목숨조차도 내어줄 수 있는 관계로 발전했던 것이다.

한 ‘인생 실패자’의 난동으로 백주대낮에 할머니를 잃고 어머니마저 삶을 기약할 수 없을 정도로 혼수상태에 빠졌을 때 윤재는 홀로 세상에 남겨졌지만 자신이 가야할 길을 잃지 않았다. 감정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에 윤재의 눈에 곤이는 오히려 그리 특별하지 않은 평범한 아이로 비쳤을지도 모르겠다. 이야기의 끝은 행복하다. 도무지 회복될 것 같지 않은 엄마가 휠체어를 타고 윤재의 병실로 들어온다. 이어 두 사람이 흘린 뜨거운 눈물. 그 눈물은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윤재와 곤이가 함께 껴안으며 흘렸던 바로 그 눈물이었다.

《아몬드》는 괴물과 같았던 두 아이들이 어떻게 보통의 다른 아이들처럼 평범한 인간으로 다시 태어날 수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이야기다. 자정을 막 넘긴 시간, 오기로 돼있는 메일을 기다리는 동안 어떤 책일까 싶어 펼쳐든 책은 정확히 두 시간 반이 지나서야 손에서 떨어졌다. 비록 230여 쪽의 두껍지 않은 책이었으나 잠시 손을 놓으면 이야기가 마치 허공 속으로 흩어질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책을 덮고 나서도 먹먹함이 한동안 가슴을 짓눌렀다. 지그시 감았던 눈을 뜨자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둡던 낯빛이 흐뭇한 미소로 바뀌어 있었다. 나이를 먹어서인가? 이젠 새드엔딩보다 해피엔딩이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