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있다 | 현장이 있다

미술로 부리는 마술

지역특성화사업 리드해봄

글 / 한나리, 사진 / 길광수, ’16.5月

「경로당」, 「화투」, 「어르신」…. 이 단어들을 통해 연상되는 것은? 리드해봄 예술강사들은 ‘미술수업’이라고 말한다. 예상 밖의 장소에서 상상치도 못했던 학생들과 함께 하는 특별한 미술시간 이야기!

“할머니! 이제 판 걷어요.”

“할머니! 이제 판 걷어요.”
“잠깐만, 한 판만 더 하구!”
“진짜죠? 진짜로 딱 한 판만 더 돌리고 그만 하실 거죠?”
어버이날을 하루 앞둔 원주시 명륜동의 한 경로당. 언제나처럼 점심식사 후 소화시킬 겸 습관적으로 화투판을 벌이고 있는 할머니들 사이에 아리따운 2~30대 아가씨 네 명이 파고든다. 여든이 넘는 어르신들의 성스러운 고스톱을 “STOP”시키는 새파랗게 어린 대담함. 그런데 불쾌해하거나 성가셔하는 내색 없이 다들 무척 익숙해 보인다.
2주에 한 번씩 영구임대아파트 경로당을 찾아오는 네 명의 아가씨들은 <리드해봄>의 미술강사들이다. 2016년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인 ‘강원을 물.들.이.다’의 일환으로 [art GO age STOP]이라는 어르신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처음부터 노인을 위한 예술교육 프로그램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 건 아니었어요. 평소에 다양한 분야의 예술강사들이 모여 자율연구모임(COP, Community Of Practice)을 하는데, 여럿이 모여서 얘기를 나누다 보면 양로원에서 봉사활동을 했던 이야기, 해외문화탐방을 갔을 때 외국의 실버문화를 접했던 이야기 등등 많은 정보를 함께 나누게 돼요. 그러다보니 ‘어르신들의 일상 속에는 이미 그들 나름대로의 예술이 녹아있더라, 우리들처럼 전문용어를 쓰지 않을 뿐’이라는 걸 느끼게 됐고, 뜻이 맞는 강사들이 ‘어르신들과 함께 예술로 놀아보자! 그분들이 지닌 능력을 꺼내드리자!’라는 맘으로 뭉치게 됐죠.”

“아마 안 될 거예요!”

어느 경로당을 대상으로 삼을 것인가가 고민의 시작이었다. 리드해봄 강사들의 선택은 자녀 없이 경제적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영구임대아파트의 경로당. 상대적으로 문화 향유의 기회가 많은 부유한 지역 경로당보다는 꼭 필요한 곳으로 가자는 판단이었지만, 주위의 반응은 비관적이었다.
“거기 어르신들은 예측하기 힘들어요. 늘 술에 취해 계시는 분도 계시고, 대뜸 쓰레기를 던지는 분도 계시고…. 수업에 참여하려고나 하실까?”
대한주택관리공단 강원지부의 도움으로 노인회장님, 통장님과 만나 열심히 설명해봤지만 다들 ‘에이, 그런 거 못 해! 허리도 아프고 팔다리도 아픈데 노인들이 미술수업을 어떻게 해?’라며 손사래를 쳤다. 고집 있게 밀어붙여 커리큘럼을 짜고 첫 수업을 시작했지만 적응하지 못해 당황한 건 강사들 쪽이었다.
“미술은 됐고 니도 이리 와서 화투나 치라!”
“아이고, 귀찮아 죽겠네!”
“난 팔 아파서 못 한다! 그리고 이 할머니는 허리 아파서 자리도 못 옮긴다!”
난관봉착. 하지만 어르신들의 표현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한다는 걸 깨닫는 데에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따봉이야 따봉!”

어르신들의 일상 속 예술인 ‘화투’를 매개로 진행하는 미술수업 현장. 전문용어가 곳곳에서 들려온다.
“나는 4월 흑싸리 다오.”
“사쿠라 이리 갖고 온나.”
“난 무조건 팔공산이지! 팔공산만 나오면 못 먹어도 고! 그림도 팔공산!”
오늘 수업의 주제는 ‘화투 그림으로 달력 만들기’다. 어느 그림에도 숫자라곤 안 적혀있는데 어르신들은 보자마자 무슨 그림이 몇 월 달력인지 단박에 알아맞힌다. 미술수업을 위해 화투판을 걷었는데 수업 모습이 영락없이 또 화투판이다. 대신 이번엔 빨간 보름달, 노란 흑싸리, 핑크 창포, 무지개 똥으로 책상 위가 가득하다.
왜 하필 고스톱일까? 그게 이 경로당 어르신들께 가장 익숙한 그림이기 때문이다. 노인회에서 점심식사가 제공되는 매주 월, 수, 금요일이면 식사 후 경로당 앞에 어르신들의 자가용인 유모차(보행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되고, 경로당 안에선 삼삼오오 짝을 이룬 어르신들의 고스톱판이 곳곳에서 시작된다. 그게 이곳의 일상이다.
“처음에 저희가 잘못 접근했어요. 이제는 수업하러 왔다고 안 그래요. 저희도 고스톱 치러 왔다고 하죠.”
오히려 2~30대인 강사들에게 화투는 미지의 문화였다. 이 수업을 준비하면서 화투의 역사, 그림의 의미, 게임 룰 등을 열심히 공부했다는 강사들. 미술 수업이라는 딱딱한 단어에 손사래 치던 어르신들이 ‘저희랑 고스톱 해요’라는 설득에 맘을 활짝 열었단다. 여전히 ‘팔 아파서 못 해’라며 엄살 한두 마디씩 늘어놓는 건 변함없지만, ‘할머니, 아까 화투패는 짝짝 소리 나게 잘만 치셨잖아요. 빨리 크레파스 잡으세요.’라고 밀어붙이면 깔깔거리며 ‘들켰다’는 표정으로 못 이기는 척 책상 앞에 앉는다. 그리고 팔 아프다는 사람 어디 갔는지 한번 손을 댄 작품은 열중해서 무척 꼼꼼하게 완성한다.
“재밌지. 너무 재밌어. 이거 하려고 기다리지.”
“어떤 젊은이들이 다 늙은 노인들한테 와서 놀자고 엉기겠어? 우리야 고맙지.”
“우리 선생님들 따봉이야! 따봉!”
속마음과 다르지만 한 번은 빼는 게 어르신들의 대화법. 그걸 캐치한 강사들은 이제 이곳 경로당의 공식 손주들이 되었다.

“art GO age STOP은 계속 됩니다”

강사들은 다들 본업으로 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지만, 어르신 수업할 때만큼은 ‘내가 가르친다’는 생각을 내려놓는다. 수업할 때 어린 학생들의 눈빛이 ‘잘 해서 선생님께 인정받아야지’라는 생각으로 초롱초롱 빛난다면, 어르신들의 눈빛은 ‘네가 뭘 하고자 하는지 어디 보자꾸나!’라는 생각으로 은은하게 감돈다고. 선생님을 올려다보는 제자와 머리 꼭대기에서 내려다보는 제자. 두 제자 모두 선생님으로부터 사랑받고 싶어 한다는 점은 동일하지만, 후자의 경우 ‘사랑 받기 위해 먼저 사랑해 줄 준비’가 된 제자들이다. 어르신과의 수업은 사랑을 주고받는 교류의 장이 되고, 문화에 대한 각자의 방식을 가르쳐주는 시간이 되기에 ‘일방적인 교육’으로 여길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커리큘럼의 종지부는 전시회가 찍을 예정이다. 전시회에서 선보이려는 건 그동안 만든 작품들이 아니라 ‘어르신 큐레이터’다. 그들의 문화를 작품으로써 보여주고 직접 해설해 줄 수 있는 실버 큐레이터! 새로운 걸 가르친 게 아니라 이미 그들이 지니고 있던 문화를 ‘표현하는 방식’을 알려드린 것이니, 어르신들의 위치는 학생이라기 보단 예술가이자 기획자가 적합하다는 게 리드해봄의 입장.
변미섭 강사는 앞으로도 실버예술교육 ‘art GO age STOP'을 꾸준히, 그리고 보다 확장시키며 이어나가겠다고 얘기한다.
“어르신 세계의 문화를 들여다보면 예술활동과 접목시킬 수 있는 장치가 너무나 많아요. 이 경로당은 고스톱으로 수업했지만, 할머니보다 할아버지가 더 많은 다른 경로당에선 장기나 바둑으로 수업할 수도 있겠죠.”
단절되어 보였던 어르신 세계의 독특한 실버문화, 그리고 예술을 통한 소통과 세대교감. 경로당에서의 미술은 문화와 문화, 세대와 세대를 연결시켜 주는 마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