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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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마음이 하나되는, 뫔 교육을 말하다

마임이스트 유진규

글 / 김동한, 사진 / 길광수, ’16.5月

수도권에 비해 문화, 예술 방면에서 소외되어왔던 지역, 강원도. 지역의 문화예술 저변확대를 위해 그간 많은 민관 차원에서의 노력이 있어왔다. 덕분에 오늘날 강원도는 많은 예술인들이 창작을 위해 찾는 곳이자 도민들이 어렵지 않게 문화를 즐기고 배우며 향유할 수 있는 곳이 되었다. 그런데 여기서 간과하지 말아야 할 한 가지. 현재 지역민들에게 제공되는 갖가지 문화예술교육은 진정한 ‘문화예술교육’이라고 볼 수 있을까? 문화예술이 ‘매개’인 교육인가, 문화예술의 향유 과정인가? 춘천을 ‘마임의 도시’로 만든 문화선구자 마임이스트 유진규와 함께 강원도의 ‘문화예술교육’의 현주소를 진단해본다.

Q. 유진규 선생님의 근황이 궁금합니다.

올해 1월부터 중국에 있었다. 15년 전부터 중국 상해를 중심으로 차茶 문화를 알리는 차회가 진행되어 왔는데, 정말 각양각색의 차들을 만날 수 있다. 또한 차회는 다양한 차들과 함께 어우러진 복합문화예술을 경험할 수 있는 이벤트이기도 한데, 7년 전부터 차회에서 공연을 해오고 있다. 이번 공연의 타이틀이 ‘아름다운 무대’였다. 석자연 스님의 섭외로, 쑤저우 본색(本色)미술관과 닿은 인연이 여기까지 왔는데, 이곳은 전통을 현대화한 예술을 소개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사실 중국의 자존심이 담긴 문화가 바로 차 문화 아니겠나. 이런 큰 행사의 마지막 공연을 장식할 수 있어서 여러 가지로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특히 1900m 고원의 잔디밭에서 새로운 감각의 공연을 하니, 갈수록 보시는 분들의 반응이 더 좋아지는 듯 하다.

Q. 대한민국의 1세대 마임이스트이자 오늘날 글로벌 축제인 춘천마임축제의 선구자라는 수식어로 익숙합니다. 궁금한 것이, ‘축제’로 즐기는 문화예술은 일반적인 공연장에서의 그것과 어떤 차이점이 있을까요?

먼저 묻고 싶은 게 있다. 예술에 과연 답이 있나? 내 말은, ‘예술은 이런 것이다’ 라며 정형화된 틀을 반복해 보여주는 행태가 과연 진짜 답이라고 할 수 있는지를 묻고자 하는 것이다.
물론 본질은 늘 하나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양상은 수없이 바뀌고 들어난다. 자연은 계속 바뀌고 모든 것이 변화해 나가는데, 그 당시의 틀만 가지고 이를 계속 반복만 하면서 이를 예술이라 우기는 것은 어찌 보면 좀 짠한 구석이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것이 맞는 것이라 생각한다. 왜? 그래야 이해하기 쉽거든. 뭐, 영화로 치자면 클리셰일 수도 있겠지만. 여하튼 그것은 깊게 예술을 이해한 자의 태도라고 보기에는 어렵다고 본다. 그러니 예술가는 이를 파괴하거나 무시하거나 틀을 깨는 방식을 늘 시도해야 한다.
‘한번 보여 진 것은 끝난 것이다, 그걸 계속 가지고 가는 것은 쓰레기를 들고 가는 꼴이다.’라는 피카소의 말을 떠올려 봐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축제’로 즐기는 문화예술을 생각해보자. 그저 관성에 젖어 했던 방식을 답습하는 공연이라면 그것은 이미 축제일 수 없다. 끊임없이 파격과 예술적 영감을 새로이 분출하는 것, 시작은 거기에서부터다.

Q. 예술은 작품이 관객을 만나는 순간 완성된다고도 하죠? 특히 유진규 선생님은 관객과 소통을 통해 완성되는 작품을 많이 보여주셨는데요. ‘문화예술을 향유한다’는 건 어떤 의미라고 보시나요?

‘향유한다’는 그 말부터 일단 분석해보자. 누릴 향에 있을 유, 즉 누리어 가진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는 어쩌면 비겁한 태도로 연결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앞서 말한 것처럼, 암막이 드리워 내린 공연장 관객석에서, 철저한 타자로서의 관객은 무대 위 광대들의 놀음을 안온하게 떨어져서 지켜본다. 이처럼 향유한다는 말은 문화예술을 유보적으로 대하며 강렬한 변화의 주체가 된다는 것을 두려워하는 태도를 은연중에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문화예술을 어떻게 대해야 할까. 일단 내 관점은 이렇다. 문화예술은 ‘자각’하는 것이다. 아름다운 사람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나. 미인? 화려한 겉모습? 하지만 진정 아름다운 사람은 투쟁하며 상처입고 괴로워하며, 자신의 삶의 답을 치열하게 추구해나가는 과정에서 일어나는 한 순간의 역동성 그 자체다. 마찬가지로 나의 공연 역시 관객들을 ‘자각’시켜주는 것에 모든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너 스스로가 깨닫고 느껴라! 라는 것이다.
전시와 공연이 결합된 나의 작품인 ‘빨간방’, ‘하얀방’ 등의 방시리즈를 보면, 일단 혼자서 들어가야만 한다. 휴대폰은 당연히 압수다. 그리고 복잡한 미로 속에서 길을 못 찾게 만들어 버린다. 그럼 어떻게 될까. 십중팔구 일시적으로 공황상태로 들어간다. 자, 그때부터 자기와의 싸움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저 객석에서 편안히 앉아서 쇼를 보는 게 아니라, 이렇게 적극적으로 내가 누구이며 지금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치열한 자각을 해나가는 것, 이것이 내가 체험시켜주고픈 문화예술을 대하는 태도이다.

Q.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마임 아카데미 수업을 진행하신 적도 많으신데, ‘관객’으로서 사람들을 만날 때와 ‘예술교육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을 만날 때 어떻게 다른가요?

매우 다르다. 일단 관객들을 만날 때의 내 마음가짐은 정말 절박하다. 쉽게 말해 ‘UFC 케이지에 올라선 이종격투기 선수’의 마음과 흡사하다. 그리고 내가 붙어야 할 상대는 관객이다. 다르게 표현하면 페널티 선상에 선 골키퍼의 절박함일 것이다. 보통 내가 지금도 이런 마음으로 무대에 오른다고 하면 의아해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설렁설렁 무대에 오를 수는 없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된다. 그러면 돈 내고 관객들이 왜 보러 오겠나. 관객에게 최상의 그 무언가를 체험시켜주는 것이 당연한 나의 역할이다. 그러니 ‘예술교육의 대상’으로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사실 편한 부분은 있다. 물론 내 뜻대로 안 따라 와주면 그것도 나름대로 힘들지만. (웃음)

Q. 유투브의 한 강연 영상에서 가장 눈길을 끌었던 것이, 오직 몸이라는 준비물만 가져오면 된다던 선생님의 그 말씀이었습니다. 마임이스트만의 삶의 태도가 묻어나오는 대목이라 참 인상 깊었는데요. 사실 인간의 자신감과 자존감의 근원이 바로 몸에서 나오지 않습니까. 이러한 몸에 대한 철학이 강원도민에게 꼭 필요한 이유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아마 ‘TED x SNU’에서 한 강연이었을 것이다. 먼저 인간이라면 자기 몸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이 시대의 몸이 살아있다고 생각하나? 그렇지 않다. 세월호도 그렇고, 군대에서 청년들이 학대당하며 죽는 일들이 계속 일어나는 등 우리의 몸은 항상 위험에 처해있다. 어째서일까. 바로 국가 차원에서 잘못된 교육을 하기 때문이다. 자기 목적의 쓰임새에 따라서 상대를 살아있는 몸으로 보지 않고, 자신이 사용할 도구로 여기는 시선이 이미 광범위하게 퍼져 있다.
그래서 나는 ‘몸짓’이라는 용어를 쓴다. 마임은 몸짓, 그런데 지금은 보여주기만 해서 되는 시대가 아니다. 몸 그 자체의 위기인 것이다. 그 상황에서 몸짓을 하면 뭐하냐. 마임 백날 해서 무엇이 바뀌겠냐는 것이다. 그런 고민 끝에 나온 작품이 ‘어루만지는 몸’(2015)이었다.

Q. 그래서 옛날에는 몸과 마음의 구분이 없었다고도 했죠. 실제로 몸과 마음 이전에는 ‘뫔’이라는 하나의 통합된 관점으로 이를 보기도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현대인들에게, 그리고 지금의 강원도민에게 필요한 것은 통합되지 못하는 몸과 마음을 하나로 일치화 시키는 작업이 아닐까 합니다. 어떻게 하면 이러한 예술 교육이 정말 강원도민에게 도움이 되는 교육이게끔 할 수 있을까요?

나는 마임이스트이니 마임으로 설명해보자면, 일단 마임을 구현하는데 있어서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되어있지 않으면 안 된다. 사실 마임은 일종의 일루젼 테크닉을 예술적으로 표현하는 분야이지 않은가. 그런데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지 않으면, 움직이면서 딴생각을 하게 되면 그 느낌이 없어진다. 이미 내가 만들어낸 환상을 함께 체험하던 관객들도 순간 벗어나게 되는 것이다. 이건 최악의 상황이다. 비슷한 예로 에어로빅에서 하는 움직임들이 있겠다. 몸은 신나게 흔들어도 머릿속은 딴생각해도 문제가 없는 것이다. 바로 이것이 몸이 도구화가 된 것이다. 그렇게 몸매는 좋아질지 모르겠지만 이것을 예술이라 불러야 할지는 글쎄, 나는 잘 모르겠다.
반대로 몸과 마음이 일치가 되면, 그러니까 ‘뫔’의 상태라면, 절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맑은 세계로 들어가 그 순간의 역동성이 되는 것이다. 그럴 때, 좋은 기들이 안에서 생기고 밖으로 뿜어져 나온다. 기라는 것은, 우리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뻗어 나가는 것이다. 이를 빼버리면 기가 아니라 기계다. 그러니 강원도민을 대상으로 한 예술 교육은 최소한 ‘기계로 만드는 교육’은 아니어야만 할 것이다.

Q. ‘문화예술교육’이란 무엇이라 정의할 수 있을까요?

내가 강연에서 항상 하는 멘트가 있다. “몸 다 가지고 왔느냐, 확인해봐라. 있냐? 근데 그게 니 몸이냐.” 그렇다. 자기 몸이라고 생각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작년에 연극영화과에 진학을 희망하던 여고생이 내게 마임을 배우러 왔었다. 제일 잘 추는 춤 춰 봐라고 하니 걸그룹 댄스, 이야...끝내주게 춘다.(웃음) 그래서 이번엔 내가 좋아하는 EDM을 배경음악으로 틀었더니, 딱 막히는 것이다. 이유를 물으니 이런 음악에서 출 춤은 배운 적이 없단다. 이게 말이 되는 상황인가? 사람의 몸이란 음악이 나오면 자연히 춤을 추게 되어있는데 말이다. 이것이 교육의 가장 큰 문제다. 가르친 대로 하지 않으면 불이익을 준다는 것. 그렇다면 불이익 받지 않으려고 시키는 대로, 배운 대로, 완벽하게 해야만 하겠지. 즉, 자기가 자기 몸이 아니고 내 생각이 내 생각이 아닌 것이다. 우리 모두가 다 이런 고장난 몸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이 글을 읽는 당신들이 원하는 대로 애들을 만들어 놓는 것이 교육인가, 아니면 알아서 살아가도록 바탕을 튼튼하게 하는 것이 교육인가. 답은 다들 잘 아실 것이다. 제발 부탁인데 예술하는 기계를 만들려 하지 말아 달라.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를 밖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예술이지, 정형화된 교육 커리큘럼 따위가 예술이 아니다. 내 눈에는 예술 교육이 필요 없다는 사람들이나 예술 기계를 찍어내려는 이들이나 그저 같은 부류로 보일 뿐이다. 이는 학부모들 역시 마찬가지다. 결국 자식을 컨트롤하려는 것은 부모 자신이 불안해서 그런 것인데 말이다. 그래서 나는 학생들에게 절대 선생님, 부모님 말 듣지 말고 “그저 너답게 살아라.”고 말해준다.

Q. 홍대 거리의 젊은 친구들을 보면, 누가 뭐랄 것도 없이 저녁이 되면 길거리에 모여 버스킹, 마술공연, 다양한 퍼포먼스 등을 자발적으로 행합니다. 결국 이들을 홍대거리로 이끄는 것은, 그 공간에 서려있는 일종의 예술적, 낭만적 정취 때문이 아닌가 하는데요. 그렇다면 보다 많은 이들이 강원도를 무대로 예술의 꽃을 피울 수 있게끔 하려면 우리가 무엇을 가장 먼저 해야 할까요?

일단, 정형화된 틀을 벗는 것이 답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기존의 방법을 답습해봐야 별 의미가 없다. 기존의 발상의 전환, 형식의 전환, 작품의 이야기나 줄거리나 메시지의 파격을 시도하며 새로운 것을 계속 만들어내야만 한다. 미술은 무조건 전시장에서 본다는 선입견을 깨버린다면, 그럴 때 일반인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다. “이런 것도 예술이야?” 라는 반응과 함께 말이다.
그런데 제일 위험한 것이, 관 차원에서의 지원 사업이다. 예를 들어 춘천시의 경우, 지역을 정해놓고 프로그램을 짜서 한다. 이건 오히려 안 하니만 못한 처사다. 예술을 싸구려로 만드는 것이다. 예술가라면 항상 새로움과 파격을 추구해야 하는 사람일 것일진데, 이러한 지원 사업은 예술가를 단순한 노동자로 만들어 버린다. 나는 돈 주니깐 몇 시부터 몇 시까지 이 구역에서 공연하면 된다, 라고 말이다. 자, 그런 상황에서 스스로의 예술에 대한 고민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저 똑같은 것을 반복할 뿐이다.
이처럼 예술은 자생력이 핵심인 분야인데, 관에서 이를 주도하는 순간 생명력이 사라지게 된다. 물론 중국의 경우는 다르다. 문화의 날이라는 국가적 기획행사를 통해 만인이 예술행사를 체험할 수 있게 해준다. 그럼에도 매우 수준 높은 공연을 볼 수 있는데, 이는 공산주의 국가만이 가지는 차이점이다. 예술가들에게 개런티를 많이 주지 않지만, 관차원에서의 여러 보장들을 통해 예술가들이 예술에만 전념할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그렇다면 돌아와서, 지금의 대한민국, 그리고 지금의 강원도는 어떠한가. 전 예술가에게 기초적인 사회보장제도나 최소한의 생계를 보장해 주는가? 그러한 보장 아래 관 주도의 지원 사업에 예술가들을 동원하고 있는가? 둘 다 아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예술가들이 자신의 예술적 긍지를 지키며 지원사업과 협업할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보장 자체가 없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강원도 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예술가들을 무료에 가깝게 동원시키려고만 하는 것은, 어찌 보면 우리 예술가들에 대한 모독이다.

Q. 마지막으로 ‘50만원으로 축제 만들기’에 대해 소개 좀 해주세요.

50만원으로 축제 만들기란, 문화예술 기획자를 양성하는 프로그램으로 무직자들을 위한 일종의 일자리 창출 사업이다. 사실 이것도 나에겐 하나의 도전인데, 6주 하루 네 시간씩 축제를 만들어 보는 것이다. 50만원이라는 것이 어떤 예술적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축제 만드는데 지원되는 돈이 50만원이어서 그런 것이다.(웃음) 아마 이 축제 만드는 주위 사람들이 죽어날 것이다. 하지만, 후원이나 협찬 등 이러한 기회를 따오는 것도 기획자의 역할 중 하나이니 그것도 본인의 성장에 있어서는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이외에도 축제 자체의 의미를 생각해 볼 필요도 있다. 왜 인류가 축제를 계속 해오고 있나? 1년에 한 번 쯤은 우리 모두가 속에 쌓인 뭔가를 다 터트려야만 한다. 그렇지 않으면 살 수가 없다. ‘안에 꽉 쌓여있는 그 뭔가를 한 번에 다 발산 할꺼야!‘ 라는 심정으로 축제를 즐기면, 그렇게 남은 기간을 평안히 사회 구성원으로서 살아 갈 수 있다. 또한 축제는 하늘에 대한 제의이기도 하며, 우리를 넘어서는 큰 무엇에 소원을 비는 일종의 리추얼이기도 하다. 그러니 정리하면 거국적인 살풀이인 것이다. 50만원으로 축제를 만드는 것이 어찌 보면 무모한 도전일 수도 있겠지만, 보다 많은 축제기획자들이 배출되어 이 세상이 신명나듯 좀 더 즐거워 졌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