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 웹진

사람과 현장이 있다 | 현장이 있다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역사 여행

우리동네 문화유산 탐험대 미행기

글 / 한나리, 사진 / 김진혁, ’16.12月

예능 프로그램에서 유명한 힙합 가수들이 나와 항일 유적지를 답사하고 역사로 랩 가사를 쓴다. EBS도 아닌데 케이블 채널의 모 프로그램에선 인기 있는 역사과목 강사들이 나와 특강을 한다.
대한민국 국민 3명 중 2명이 반대하는 역사 교과서 국정화 사업. 이것이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와 맞물려 이 나라의 근간을 흔들고 있다는 불안감 때문일까? 요즘 국민들은 우리 역사에 대한 갈증이 심하다. 이런 시기에 강원도의 중학생들이 “우리가 몰랐던 독립운동 이야기”라는 주제로 문화유산 탐험길에 올랐다. 원주, 횡성, 속초에서 각각 찾아온 59명의 앳된 학생들. 1박 2일 동안 강원도 독립운동의 발자취를 쫓으며 아이들은 어떤 유산을 가슴에 담아올까?

우리동네 문화유산 탐험대
도내 문화유산 및 문화기반 시설 탐방을 통해 지역에 대한 이해 및 자긍심을 고취하고, 문화유산과 연계된 문화예술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인성 및 창의성을 배양하는 강원문화재단 문화예술교육지원센터의 청소년 캠프 프로그램.

출발 전 블랙홀 같은 역사수업

1박 2일 여행을 떠나기 위해 저마다 짐을 싸들고 집결지로 모이는 학생들을 웬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다. 첫 답사지로 출발하기 전, 우리나라 독립운동의 역사를 강의해 줄 항일영상역사재단의 백낙범 선생님. 학생들이 모두 도착하자 선생님은 프레젠테이션으로 사진자료들을 보여주며 1875년 강화도 사건부터 1945년 독립의 순간까지 장황한 역사 이야기를 시작했다.
단 2시간 안에 압축해서 듣는 항일 투쟁의 역사. 초고압력으로 핵심만 압축한, 그야말로 블랙홀 같은 수업이다. 하지만 수업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아이들은 블랙홀에 빠져들 듯 잠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아무리 열심히 들으려고 노력해도 자장가처럼 들리는 복잡한 역사 수업. 충분한 시각자료가 있었지만 아이들의 눈에는 교과서에 실린 사진처럼 보일 뿐이었다.
솔직히 나는 수업이 재밌었다고 말한다면 내가 너무 잘난 척 하는 사람처럼 보일까? 지루함을 이기지 못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내가 느낀 건 생뚱맞게도 ‘세대차이’였다.
지금은 철거되어 사라진 조선총독부 건물의 사진이 스크린에 떴을 때, 무표정했던 학생들과 달리 나는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것은 어린 시절 부모님 손잡고 다녀왔던 국립중앙박물관 건물이었으니까. 지금도 그 건물의 첨탑을 철거하던 장면이 또렷이 기억난다. 조선총독부 건물은 내 삶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었기에 나는 이것을 ‘나의 역사’라고 체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겐 직접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암기 대상’일 뿐이다. 옆집 아줌마의 사돈의 팔촌 이야기를 아무리 열심히 들려줘 봤자 나와 아무런 관계가 없으면 지루할 뿐이듯 말이다.
그런데 멍 때리던 아이들의 눈동자에 한순간 반짝 하고 빛이 되살아난다. 드디어 익숙한 사진이 나온 것이다! 스크린에는 세 사람의 사진, 아베 총리와 명성황후, 그리고 오시마 요시마사의 초상화가 떠있다.
“여러분, 이 사진이 누구 얼굴인지 알아보겠어요?”
“네. 아베 총리요.”
“그 옆에는 명성황후예요.”
“맞아요. 그렇다면 맨 마지막 사진은 누구일까요?”
“….”
도무지 모르겠다는 표정의 학생들에게 선생님은 오시마 요시마사라는 인물의 설명을 시작한다. 을미사변을 일으켜 명성황후를 시해한 총대장이자 아베 총리의 고조부. 늘 TV에서 보던 아베 총리가 명성황후를 시해한 저 사람의 고손자라고? 교과서 속 암기거리가 현재와 연결되자 아이들은 비로소 이것이 ‘나의 역사’라는 걸 체감하기 시작한다.

춘천에서 만난 윤희순 의사와 뮤지컬 감독

두 시간의 역사수업을 마친 후, 첫 답사지인 춘천시립도서관의 윤희순 의사 동상 앞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동상 앞에 한 뮤지컬 감독이 아이들을 기다리고 있다. 전국 최초로 윤희순 의사의 이야기를 뮤지컬로 만들어 연출한 김정훈 감독.
“여러분, 이 분이 누군지 알아요? 바로 이곳 춘천으로 시집와서 의병활동을 했던 윤희순 의사예요. 이분은 우리나라 최초로 여성 의병장이 되신 분이에요.”
여성 독립운동가라면 오로지 유관순 밖에 모르던 아이들이 처음으로 윤희순 의사의 일생 이야기를 듣는다. 우리가 사는 강원도에, 이렇게 가까이에 여성 독립운동가가 있었다니….
왜 우리 지역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까? 왜 아이들은 안 그래도 외울 내용이 많은데 굳이 시험문제에 잘 나오지 않는 우리 지역의 역사까지 꼭 배워야만 할까? 그건 역사가 나와 동떨어져 있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기 때문이다. 억지로라도 노랫말을 개사해 외우고 연상되는 단어를 만들어 암기하고…. 그래야만 했던 막연하고 장황한 역사 속에서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것, 이것이 곧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이야기임을 체감하는 것. 나날이 세월이 흘러 일제강점기의 아픔과 한국전쟁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만 가는 후손들에게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는 역사여행’은 시간의 간극을 좁힐 수 있는 좋은 방법이다.
“세월에 흐른다고 역사 속 위인들의 업적이 사라지지는 않습니다. 중요한 건 후손들이 어떻게 조명하느냐죠.”
뮤지컬 윤희순을 만든 김정훈 감독과 배우들 역시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그 시대를 살아본 적 없는 후손일 뿐이다. 하지만 제대로 된 뮤지컬을 만들기 위해 배우들은 연기연습에 앞서 서대문 형무소를 답사하고 소녀상을 찾아가 참배하며 시간의 간극을 줄이려 노력했다고 한다. 그렇게 연기한 뮤지컬 윤희순이 관객들의 시간의 간극도 줄일 수 있기를 바라면서.
이제 아이들도 역사가 나의 이야기라는 걸 느꼈을까? 다음 답사지로 이동하는 아이들의 눈빛에는 서서히 자발적인 궁금증이 피어오르는 듯 했다.

홍천에서 만난 한서 남궁억과 문화관광해설사

두 번째 답사지인 한서 남궁억 기념관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든 남궁억 선생의 동상이 보인다. 한 여학생이 깔깔대며 남궁억 동상의 손을 잡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라며 장난을 친다. 쿵짝이 맞는 친구가 우뚝 서서 얼음이 된 포즈를 취해주며 맞장구를 치자 또 까르르 웃음이 터진다.
참 신기한 일이다. 이 아이들도, 그 부모님 세대도, 또 그 위의 부모님 세대도 어릴 적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를 하고 놀았다. 누가 그렇게 하라고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자연스럽게 놀이는 세대를 넘어오며 전승되고 있다. 습관적으로 그렇게 해왔을 뿐 수많은 꽃들 중에 왜 하필 ‘무궁화 꽃’인지는 모른 채 말이다.
남궁억 선생의 업적이 전시된 전시실에 이번엔 문화관광해설사 아저씨가 등장한다. 한서 남궁억 연구회장이자 한서감리교회 목사이기도 한 현재호 문화관광해설사. 마치 손주들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문화관광해설사 아저씨는 학생들을 바닥에 편히 앉게 하고 무궁화가 어떤 꽃인지 설명을 시작한다. 옛날에 장원급제한 사람에게 임금님이 하사하던 어사화이기도 했고, 지금 국경일마다 게양하는 태극기의 국기봉이기도 한 우리 겨레의 꽃. 일제강점기에 탄압을 받았지만 한서 남궁억 선생이 몰래 사람들에게 무궁화 묘목을 나눠주고 “무궁화 꽃이 피었습니다” 놀이도 퍼뜨리며 목숨을 걸고 지켜낸 꽃.
남궁억 선생의 이야기를 듣자 아까까지 장난치기 바쁘던 아이들의 표정이 사뭇 진지해진다. 우리가 어릴 적부터 늘 해왔던 놀이에도 역사적 유래가 있었구나! 또 하나 찾아낸 역사와 나의 연결고리에 아이들이 느끼는 시간의 간극은 더욱더 줄어들고 있었다.

인제에서 만난 만해 한용운과 연극인들

마지막 답사지는 숙소이기도 한 인제의 만해마을이다. 독립선언서 작성 33인 중 한 분인 만해 한용운 선생이 귀의했던 절 백담사, 바로 그 인근에 그의 뜻을 기리고 실천하고자 만들어진 곳이 바로 만해마을이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아이들이 강당에 모이자 이번엔 연극인 세 사람이 아이들 앞에 등장한다. 문화프로덕션 도모의 황운기 연출가와 송정미 작가, 그리고 배우인 김도란씨. 세 선생님은 오늘 하루 종일 강원도의 독립운동가에 대해 배우면서 느낀 점을 예술로 표현해보자고 아이들에게 미션을 던진다.
우선 간단한 게임을 통해 조를 짜게 하고, 각 조마다 서로 다른 시(詩)를 나눠주는 선생님들. 아이들은 조별로 받은 시를 연극으로 만들어야 한다. 살짝 다가가 어떤 시를 나눠줬는지 엿보니, 맙소사! 이육사의 「광야」, 윤동주의 「서시」, 심훈의 「그날이 오면」,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정말 어려운 시들이다. 아직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시도 수두룩! 아이들은 머리를 맞대고 애매모호한 시의 뜻을 해석하느라 끙끙댄다.
“네가 만세를 해. 그러면 일본군이 저기에 서 있다가 와서 쏘는 거야. 오키?”
“내가 앞에 앉아서 시를 쓰고 있으면 뒤에서 너희가 별이 되어 줘. 반짝반짝하면서.”
언어영역 수능풀이를 위한 참고서의 설명 한 줄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인 시는 아이들에게 어떻게 해석될까? 같은 시대를 공유하지 않는 시와 아이들은 대화할 수 있을까? 도모의 연극인들은 아이들에게 공부로서가 아니라 예술활동으로, 놀이로 역사를 접하게 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 아이들이 스스로 해석하고 표현해낸 역사의 한 장면은 참으로 놀라웠다.
일본군에게 포박되어 끌려가며 “아빠, 봄인가 봐요. 저기 꽃이 피었어요.”라고 말하는 아이. 그런 아이를 보며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라고 한탄하는 아빠의 모습. 심하게 고문을 받다가 풀려나오는 남궁억 선생이 무궁화가 가득한 꽃길을 보고 감탄하며 걸어 나가는 모습.
물론 장난기 가득한 중학생들의 연극이다 보니 일본군이 말끝마다 “~데쓰”를 붙이고, 턱 밑에 손으로 꽃받침을 만들며 무궁화 연기를 하는 여학생에게 “뭐야? 이 꽃은 왜 안 피어?”라며 핀잔주는 등 개그요소도 가득했다. 재미와 감동,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은 연극이랄까?
“처음엔 막막했는데 시를 읽어보면서 화자의 마음을 느끼고 표현해보고자 했어요.”
“교과서에서 나오지 않은 독립운동가들을 배우면서 역사는 읽는 게 아니라 알아가야 한다는 걸 느꼈어요.”
마냥 철부지인 줄만 알았던 아이들은 이번 ‘우리동네 문화유산 탐험대’ 여정을 나름대로 가슴 깊이 새기며 나의 역사로 만들고 있었다.

‘요즘 학생들은 6.25를 한국과 일본이 싸운 전쟁으로 알더라, 요즘 학생들은 안중근 의사 얼굴도 몰라보더라.’ 이런 얘기를 들으며 나날이 가벼워져 가는 역사의식에 어른들은 답답함을 금치 못했다. 어쩌면 어른들은 세대차이를 인정하지 못하고 잘못된 접근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역사를 떠먹이려 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아이들은 충분히 영리하다. 다만 시간의 간극이 어른들보다 훨씬 더 벌어져있기 때문에 역사공부가 어려운 것이다. 역사가 나의 이야기라는 걸 느끼게 해주는 것, 교과서를 덮고 일단 나의 삶 속에 있는 역사를 직접 만나게 해주는 것이 아이들 세대에게 역사를 알려주는 첫 걸음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