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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도 사람도 '시간'이 필요하다

채효정 /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대학은 누구의 것인가> 저자, ’17.8月

왜 늘 낡고 오래된 것을 다 부수고 새로운 것을 세워야 하는지. 고치고 다듬고 적응하고 진화하며 시간 속에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처럼, 우리의 마을도 그렇게 시간에 시간을 더하여 미적 가치를 만들어낼 순 없는 것일까.

오래된 시간의 마을 ‘백석 마을’

춘천시 근화동. 재개발 지구인 마을은 고즈넉이 아름다웠다. 강원문화재단의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지원사업 ‘사이사이’ 모니터링을 위해 찾아간 곳이다. 낡고 오래된 것 속에 머무르는 시간의 가치를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마을은 풍경으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아주 오래된 골목, 아주 오래된 문방구, 아주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던, 아주 오래된 학교. 학교 앞 골목길에 서서 집에 가는 아이들의 모습을 한 참 쳐다보다, 문득 새롭다 하는 것이 다 싫어졌다. 왜 늘 낡고 오래된 것을 다 부수고 새로운 것을 세워야 하는지. 고치고 다듬고 적응하고 진화하며 시간 속에 살아가는 다른 존재들처럼, 우리의 마을도 그렇게 시간에 시간을 더하여 미적 가치를 만들어낼 순 없는 것일까. 재개발의 폭력성과 몰역사성에 반대하여, ‘도시재개발’에서 ‘도시재생’의 관점으로 개발의 목표와 방식이 전환된 것은 그런 문제의식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도시재생사업의 현실은 어떠한가. 낡고 오래된 골목길들을 도시 소비자들의 향수를 만족시키는 ‘옛날의 쇼윈도’ 같은 무대로 만들어 공간을 상품화하는 과정으로 변질되면서, 결국은 그곳에서 살아왔던 사람들이 함께 지키고 만들어낸 경관을 지대수입자들이 노리는 약탈지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 재개발되지 않은 동네들이 지켜왔던 소박하고 자생적인 것은 재개발 사업 지구로 선정되는 동시에 곧바로 황폐해지곤 한다. 뜯어내고 수리할 집을 가꾸지 않는 것처럼, 곧 헐릴 동네에 애정을 품기란 힘든 법이다. 그런데 그런 마을을 주민들의 손으로 아름답게 꾸미고 가꾸어보려고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근화초등학교에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고, 그 아래로 통나무 모양의 책상과 의자가 드문드문 놓여 있는 임간교실을 지나면, 운동장 한 켠에 컨테이너 박스로 만든 간이 교실이 있다. 그 교실에서 한 선생님이 목공 수업을 한다. 이번 지원사업에 선정되어 춘천 민미협에서 진행하는 ‘쑥덕쑥덕 백석마을’이란 이름의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사업이다. 마을의 폐목재를 모아 벤치를 만든다고 한다. 곳곳에 마을 안내표지판도 만들어 세울 계획이라고 했다. 면접심사 때 기획자로부터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각양각색 모양으로 만들어질 벤치가 마을 주민들이 앉아 쉴 수 있는 쉼터, 골목의 사랑방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또한 어쩌면 이 활동이 흐릿해진 골목 이웃들의 관계를 다시 잇고 마을에 활력을 불어넣는 과정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상상을 했다. 목재를 담을 리어카를 끌고 골목을 돌아다니는 것 자체만으로도 아이들은 신이 나고, 동네 노인들은 오랜만에 보는 풍경을 반가워하는 상상. 그렇게 마을에 생기가 돌게 되는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공간에 대한 문화적 붓터치가 가져오는 효과는 크다. 특히 그것이 상업적이거나 전문가적인 것이 아니라 아마추어적인 수작업일 때는 더 그렇다. 마을에서 아름다운 오브제를 발견하는 일은 이 마을에서 삶이 방치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사람들이 자신이 사는 공간에 대해 이런 애정을 가질 만큼 좋은 마을이라는 것을 느끼게 해준다. 이웃 간의 유대 관계,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심성과 민도, 인간미와 미적감각 같은 무형의 사회적 자산은 종종 골목마다 잘 가꾸어 놓은 화단, 방치되지 않고 텃밭으로 가꾸어놓은 공터, 정돈된 상태와 같은 공간의 미학을 통해 드러난다.

그리고 그런 공간의 재창조가 이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스스로의 손에 의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 작은 활동으로도 우리가 사는 골목 하나에 창조적 변화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 이것을 직접 해보고 경험하고 느껴봄으로서 깨달을 수 있다는 것. 그것이 지역특성화 문화예술교육 사업이 추구하는 목표 중의 하나일 것이다. 나는 백석마을 기획이 소박하면서도 신선했고, 그 목표에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진심으로 잘 되기를 바랐다.
그러나 모니터링을 갔을 때 만난 현장은 모든 조건에서 난관에 부딪쳐 있었다. 수강생 모집부터가 난항이었다. 정작 리어카를 끌고 골목길을 돌 아이들이 없었던 것이다. 학교와 사전 조율이 되어 목공 수업을 할 수 있는 공간도 얻고, 학교 공문을 통한 모집 안내도 협조를 받은 터라 손쉽게 될 줄 알았는데 예상대로 되지 않았다. 목공 수업 선생님은 그렇게 ‘모든’ 아이들이 다 학원에 다니는 줄 몰랐다고 했다. 어른들은 어떨까. 역시 바쁘다. 어른과 아이들이 함께 하는 강좌로 기획을 했는데, 방과 후 오후 시간대에 목공수업을 들을 수 있는 어른들은 많지 않았다. 실제로 직업이 간호사인 수강생이 두 사람 있었는데 삼교대 근무 시간에 맞춰 수업 중에 일찍 자리를 떠야 했다. 참여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통해 관계를 맺고 이어간다는 것은 사실상 거의 불가능해보였다. 이것이 단순히 시간대의 문제로만 보이지는 않았다. 우리가 가진 ‘시간의 양’이 문제인 것이다. 가끔 저녁에 하는 시민강좌의 강의를 맡을 때가 있다. 퇴근 시간 후 7시에 강의를 시작하면, 강의를 하는 나도 강의를 듣는 사람들도 모두 토끼처럼 빨간 눈으로 만난다. 우리에겐 퇴근 후에 여가활동을 하고, 집에 와서 밥을 먹고, 휴식을 하며 하루를 정리하고 잠자리에 들 수 있는 삶이 없다. 이러한 여가의 시간이 없으니 아무리 좋은 문화예술강좌를 열어도 고난의 행군이요, 또 하나의 전투가 되고 만다. 아무리 배우는 일을 놀이처럼 하자고 해도, 24시간을 쪼개어 잠을 줄이고 해야 하는 일이라면 결코 놀이가 될 수 없다. 한 사회의 노동 조건과 문화예술적 향유 수준은 그렇게 직결되어 있었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문화운동은 노동운동과 함께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인간다운 노동’의 조건이야말로 일상 속의 예술적 창작활동의 조건이기 때문이다.

숙성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편으로 내가 현장에 갈 때마다 주목하는 존재는 문화예술강사들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화폐적 대가는 결코 크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역과 마을을 기반으로 활동하는 분들에게서 어떤 명망가들이 보여줄 수 있는 것 이상의 열정과 도전과 헌신을 볼 때가 있다. 그런데 평가는 그의 내면에 있는 예술가적 열정이 아니라 강좌라는 외형을 통해 이루어진다. 참여도나 수강인원 같은 양적지표로 말이다. 하지만 앞서 보았듯이 수강생 참여도는 다만 강사의 강의 기술에만 달려있는 것은 아니다. 수강생이 불안정하면 강사도 힘이 빠진다.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고 배워가는 기쁨 대신 강의 시수를 채우는 것이 일차적 의무로 다가온다. 다른 강좌도 그렇겠지만 무엇보다도 예술가에게 그건 정말 못할 짓이다. 그래서 나는 늘 ‘예술 강사’라는 존재가 ‘예술가’라는 존재와 상호대립적 관계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예술 활동으로 생업과 생계를 유지하기 어려우니, 많은 예술가들이 이런 지원사업에 예술강사로 응모한다. 하지만 기획안대로 하나씩 수행해나가야 하는 과정은 변화하는 상황과 조건 속에서 변용할 수 있는 힘을 요구받고, 그런 힘을 자기의 창조적 활동의 근원으로 삼는 예술 활동과 근본적으로 모순된다.
현장에 가서 이야기를 나눠보면 자기의 생활 철학이나 예술에 대한 가치가 확고한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면접심사장은 한 예술가의 응축된 삶의 결을 보여주기에 쉽지 않은 곳이다. 나도 공모사업에 지원해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그 자리에 앉은 이들의 심정을 잘 안다. 내가 심사를 받는 입장일 때 기분이 상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다. 반대로 내가 심사하는 입장이 되어도 마찬가지다. 마을의 ‘예술가들’ 사이에 경험 많은 ‘업자’들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초심자들에겐 도전정신과 진정성이 있지만 경험적 미숙함이 우려되고, 오랜 경력자들에겐 경험이 독이 되어 지역의 문화예술 활동가나 교육자보다는 ‘문화예술사업가’의 마인드가 지배적으로 되는 것이 우려스럽다. 마을 예술가들, 마을의 문화교육자들을 공모 지원이란 형식으로가 아니라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지원하고 키워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 요즘 나의 고민이다.
사람도 지역도 숙성의 시간을 거쳐야 더 깊은 아름다움이 빚어져 나온다. 지금과 공모사업은 그 숙성의 시간을 주기에는 너무나 한계가 많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함께 그 시간을 담보해낼 수 있을까. ‘시간’이란 것은 지금 문화예술교육이 당면한 가장 큰 화두가 아닌가 한다.